굵고 짧은 미국 대통령 사과 … 여론 보며 수위 높이는 한국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청와대사진기자단·블룸버그 뉴스

2010년 1월 7일 오후 4시30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스테이트 다이닝룸 벽난로 앞에 섰다. 공식 국빈 만찬장이자 미국 대통령의 주요 연설과 발표가 이뤄지는 장소. 벽난로 위에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미국 전역에 TV 생중계된 13분 동안의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보름 전인 크리스마스에 발생한 항공기 폭탄테러 미수사건의 조사결과를 설명했다. 이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고 실수를 바로잡아 더욱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최종적인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국가와 국민을 보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Moreover, I am less interested in passing out blame than I am in learning from and correcting these mistakes to make us safer. For ultimately, the buck stops with me. As President, I have a solemn responsibility to protect our nation and our people. And when the system fails, it is my responsibility.)

박 대통령 네 차례 사과에도 여론 나빠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네 차례에 걸쳐 사과했다.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사전에 사고를 예방하지 못하고 초동대응과 수습이 미흡했던 데 대해 뭐라 사죄를 드려야 그 아픔과 고통이 잠시라도 위로받을 수 있을지 가슴이 아프다. 이번 사고로 많은 고귀한 생명을 잃게 돼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럽고 가슴이 무겁다”고 말했다. 참사가 빚어진 지 14일 만이었다.

지난 2일 종교지도자 간담회에선 “대통령으로서 참담한 심정”이라며 “대안을 갖고 앞으로 대국민 사과를 드리겠다”고 했다.

4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사고 발생부터 수습까지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고, 6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에선 “유가족들께 무엇이라 위로를 드려야 할지 죄송스럽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은 조만간 대국민 공식사과를 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거듭된 대통령의 사과에도 논란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사과의 시기와 내용, 형식을 둘러싸고서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대통령의 사과는 어떠해야 할까.

백악관 공식 홈페이지의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의 사과연설 전문을 박근혜 대통령의 이번 사과와 비교해 보면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대통령의 사과 프로토콜(protocol)’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공식 연설장소인 스테이트 다이닝룸을 ‘사과의 장소’로 정했다. 대통령의 주요 발표와 국정연설이 이뤄지는 장소다.

‘사과의 형식’도 달랐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전국에 TV로 생중계됐다. TV라는 매체를 이용했지만 사실상 국민을 상대로 직접 사과한 것이다.

‘사과의 언어’ 역시 차이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대통령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사용한 표현인 ‘The buck stops with me(최종 책임은 내게 있다)’는 미국 대통령의 수사(修辭)처럼 여겨진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 명패에 ‘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를 새겨두고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되새겼다고 한다.

사실 이 표현은 은어(隱語)다. 포커 게임에서 딜러의 순번을 결정하기 위해 사용한 사슴뿔 손잡이 칼(buckhorn knif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잡이가 사슴뿔로 된 칼을 다음 딜러에게 넘겨주는 것(passing the buck)이 ‘책임과 의무를 전가한다’는 관용구로 굳어졌고, 이후부터 수사슴 또는 돈을 의미하던 벅(buck)에 ‘책임’이란 뜻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미국, 사과 통해 위기 넘고 국면 전환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사과하고,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는 건 미국에선 전통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사과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국면을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놨다. 케네디 행정부의 최대 실패로 여겨지는 쿠바 피그스만 침공 사건이 대표적이다. 침공 실패 후 사흘이 지난 1961년 4월 21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침공을 계획한 것이 미국 정부이며 작전이 실패로 끝났음을 자인한다.

한 기자가 “왜 지난 며칠 동안 국무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느냐”고 따져 묻자 케네디 대통령은 유명한 답변을 했다.

그는 ‘승리했을 때에는 자기 공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100명이지만, 실패했을 땐 나서는 사람이 없다(Victory has a hundred fathers, but defeat is an orphan.)’는 속담을 인용한 뒤 이렇게 말했다.

“추가적인 발표나 구체적 논의를 한다 해서 책임을 피할 순 없습니다. 내가 이 정부의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Further statements, detailed discussions, are not to conceal responsibility because I’m the responsible officer of the Government.)

전문가들은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리더의 사과에 대해 국가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한다.

한국대통령학연구소 임동욱(한국교통대 행정학과 교수) 부소장은 “미국은 대통령의 수사(Presidential Rhetoric)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대통령이 사과할 때에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국민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서 끝난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고 말했다. 임 부소장은 이어 “충분한 고민 없이 이뤄진 듯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효과적으로 사과하는 법』의 저자인 미국의 ‘사과 전문가’ 존 케이더는 중앙SUNDAY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사과 문화와 미국의 문화는 다르다”라고 전제하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선출된 국가수반으로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식의 ‘기관의 사과(institutional apology)’는 개인의 사과와 달리 ‘힘있는 리더의 언어’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그는 “진정한 사과를 했다기보다는 아쉬움을 표한 정도에 그친 것 같은 레토릭”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박 대통령이 지금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방어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라며 “사과의 투명성과 모든 국민 앞에서 솔직해지는 것이 진정성을 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라고 조언했다.

이동현·전수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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