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해변보다 호젓한 시골길을"|공부에 쫓기던 심신, 느긋하게 놔두자| 과중한 방학일과표는 오히려 역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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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여름은 사랍을 지치게 만든다. 특히 도시생활은 짜증스럽다. 탁한 공기, 거리에 넘치는 사람들, 살인적인 폭염, 정말 어디로든지 도망가지 않고는 못 배겨날 것만 같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벌써부터 어디로든 떠나자는 성화가 대단하다. 최근까지만 해도 도봉산계곡에 등산을 가자는 말만을 듣고도 그렇게 신나하고 좋아하던 A가 방학날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폭삭 풀이 죽어 있다.
『쳇! 우리 집은 뭐 이렇게 시시해. B네는 동해에 가서 5박6일이나 있다 오고 Y네는 새마을호 타고 해운대 가고, W는 설악산, O는 동백정, S는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 간대』
이래서 바야흐로 「바캉스」는 아버지의 유능 무능을 평가하고 어린 가슴에 공연한 우월감과 좌절감을 주고 있다.
어린이의 여름방학은 단지 며칠간의 요란스런 가족동반의 「바캉스」만 다녀오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린이의 여름방학중 가족끼리 오붓한 정을 나누는 가족동반 여행은 더할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그 여행은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꿈과 커다란 기쁨을 주고 평소에 할 수 없던 산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반드시 돈을 많이 들이는 요란스런 「바캉스」라야만 「산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번잡한 도시에서 살고있는 어린이는 불안스럽지 않은 당일 여행으로 가까운 농촌을 찾아 메뚜기도 잡아주고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구름을 구경하는 등으로 자연속에 묻히고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농촌이나 해안지방에 사는 어린이라면 가까운 도시의 친지집으로 보내 자기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시키도록 배려한다.
자신과 다른 환경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기또래 어린이의 생활을 접하는 기회를 주는 것은 자기 위주의 생활만을 고집하는 요즈음 어린이들에게는 특히 필요한 경험이다.
여름방학에 뒤떨어진 학과공부를 시키고 특기교육을 시키고… 등으로 대단한 기대를 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어린이들을 그냥 좀 놓아두라고 권하고 싶다. 개미 쳇바퀴 돌듯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바쁜 일상에 매어살던 어린이들은 좀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
지킬 수도 없는 과중한 일과표를 만들어 놓고 어린이를 몰아가는 어머니의 태도는 적극 피해야 한다. 너무 방임해 두지 않는 정도로 어머니는 적당히 자극을 주는 것이면 족하다.
또한 평소에는 도저히 하기 힘든 엄마와 함께 전시회를 찾아가 그림을 감상한다거나 가까운 고궁 등 명소를 찾아보는 등의 기의로 여름방학을 활용하자.
새벽 일찍 아빠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면서 자연스레 자전거로 우유를 배달하는 아저씨, 신문뭉치를 옆구리에 기고 달리는 소년, 냄새나는 쓰레기통을 비우는 아저씨 등에 자녀들의 관심이 모이도록 유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모두들 잠자는 새벽,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이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린이에게 노동의 신성함과 함께 고생하는 사람의 생활을 알게 하는 때문이다.
매일매일 학과공부에 바쁘던 어린이, 집안일에 눈코 뜰새없이 돌아가던 어머니가 평소에 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란 별로 없다. 부모들은 『공부해라』 『숙제해라』등 자칫 일방적인 명령만을 하게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방학중에는 되도록 어머니와 어린이가 많은 밀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라고 권하고 싶다. 무심코 어린이가 내던지는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어머니는 평소 깨닫지 못하던 자녀들의 세계를 접하게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녀들의 부모나 학교에 대한 불만, 그의 꿈, 친구관계 등을 알아보는 것은 어린이를 지도하는데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록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지만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데서만 서로의 이해가, 사랑이 싹트고 뿌리가 내리고 자라는 때문이다.

<이대교수· 교육학>
▲30년 일본광도 출생
55년 이화여대교육학과졸업
▲57년 동대학원 졸업
▲현 이화여대교육학과 교수
한국 어린이협회 회장
한국교육학회 유아교육연구회장
어린이 국제여름마을(CISV)한국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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