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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안네·프랑크의 일기』의 현장|【「암스테르담」서 글·사진 최종률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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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금빛의 눈부신 왕궁. 그 앞의 「담」 광장은 속칭 「히피 광장」으로 통한다.
청춘 남녀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듯이 이 광장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무려 1천여명은 될 듯. 「베트남」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60년대 말기, 이 광장은 징병을 기피한 미국 청년들로 붐볐었다. 「유럽」의 동정파 청년들까지 합세해 무릇 「담」 광장은 「히피」의 광장이 되었다. 「스틸」양은 미국 「시카고」에서 월부 비행기표와 6백「달러」를 갖고 「유럽」 일주 여행을 떠나온 19세의 소녀. 역시 「히피」풍을 하고 친구들과 「담」 광장에 앉아 있다.
『전쟁? 왜 그런걸 묻는가? 당신은 어떤 대답을 원하는가? 설마 동물적인 「워망거」 (전쟁광)들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영웅보다는 평범한 인간이 더 좋다. 모든 사람들이 적의 없이 살수 있는 이웃과의 평화·가정의 평화를 잃고 싶지 않다. 나는 결혼하면 전원으로 가 살고 싶다. 전쟁 냄새가 나는 도시는 싫다.』
이쪽에 반문을 거듭하며 천천히 대사를 외듯이 말하는 「스틸」양은 잠시 하늘을 쳐다 본다. 푸른 하늘·태양·무성한 가로수들.
「암스테르담」의 중심지인 「담」 광장에서 서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안네·프랑크」의 집이 있다. 「프린센」 운하를 앞에 둔 고풍한 「네덜널란드」식 4층 건물.
2층부터 꼭대기 다락방까지 공개. 경사가 70도는 됨직해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오른다.
『삐걱, 삐걱, 삐걱….』
「안네」의 일가는 바로 이런 소리가 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죄었던지. 한 밤중 「게슈타포」 (「나치」 독일의 비밀 경찰)의 비상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가 지나간 뒤면 무덤 속 같은 정적 속에서 고양이의 발짝 소리만 들어도 「안네」 일가는 절망적인 긴장에 사로잡혀 있었다. 「안네」는 그런 공포의 순간엔 이 (치아)를 덜덜 떨며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안네」 일가 4명 (부모와 자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것은 1933년. 「나치」의 유대인 학대를 피해 자유 천지를 찾아 온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l940년5월 독일 「나치」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안네」가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동 구조로된 「안네」의 집은 은신을 하기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뒷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서가로 위장한 장면은 생과 사의 경계를 보는것 같아 사뭇 숙연한 느낌을 준다.
1947년 「안네·프랑크」의 일기는 「네덜란드」에서 『뒷집』 (Het Achterhuis)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다. 초판 2천부.
그러나 이 일기의 감동은 삽시간에 세계를 술렁거리게 했다. 「안네」의 집 3층은 세계 50여개국에서 번역, 출판된 『안네의 일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물론 우리 나라의 번역만도 2종이나 볼 수 있다.
「안네」 일가는 1944년8월4일 바로 이 집에서 「게슈타포」에 발각, 체포되었다. 「폴란드」의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안네」의 집 다락방엔 남쪽으로 창이 하나 뚫려 있다.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교회의 첨탑. 「안네」는 2년1개월의 밀폐 속에서 필경 그 하늘과 그 종각을 보며 목마르게 구원을기다렸을 것이다.
『인간은 조립식의 간역 주택을 발명하면서도 왜 비행기와 전차만은 크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일까』- 어느날 「안네」는 이런 일기도 써놓았다.
「아우슈비츠」에서 한달만에 「안네」가는 해방을 맞았다. 「암스테르담」이 다시 연합군에 탈환된 것이다. 그러나 「푸른 하늘」도, 교회의 종각도 「안네」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듬해 봄 「티푸스」에 걸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 나이 15세.
「안네」의 일기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안네」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독일군에 의해 짓밟힌 책더미 속에서 「안네」의 친구들이 찾아낸 것이다.
이 원본은 지금 「스위스」 「바젤」에 있는 한 은행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 이곳엔 「안네」의 아버지 「오토·프랑크」가 아직도 살고 있다. 87세의 할아버지. 「안네」의 집은 「안네」 재단에 의해 운영된다. 관람객들의 입장료 (3길더=원화 6백원 정도)와 헌금을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오토」옹의 소망은 유내인 차별 사상을 이 지상에서 몰아내는 일.
「나치」를 고발하는 사진들이 전시된 방에서 젊은 독일인을 만났다. 「크롤」 부부. 3세 된 아기를 안고 있는 30대의 가장 「크롤」은 말한다. 『이런 지옥의 역사는 다신 없어야지요. 우리는 항상 역사의 부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옆에 서있던 부인도 『정말이예요』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연 25만명의 관람객이 이 「안네」의 집 계단을 오르내린다. 적어도 이들만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크롤」과 같은 감회를 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네」의 집앞을 흐르는 「프린센」 운하에선 아이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뭐요? 전쟁? 위잉- 땅땅땅- 멋있지요!』
「안네」가 살아서 창밖으로 이 아이들을 보았으면 뭐라고 했을지. 세상엔 철부지의 생각을 갖고 있는 어른들도 많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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