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패러디 파라다이스] 취팽의 정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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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호 30면

오전에는 느긋하게 관광이나 할 생각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오후 4시25분에 있었고 공식 일정은 전날 다 끝났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의 정원을 구경하고 싶었다. 마침 상하이에는 위위안(豫園)이라는 정원이 있었다. 중국 정원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정원은 상하이 구시가지 푸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장 한복판에 정원이 있는 셈이다. 정원으로 가는 길은 미로 같았다. 몇 바퀴째 같은 곳을 돌면서도 입구를 찾지 못했다. 계속 왼쪽으로 꺾어지라는 애들의 말을 상기한 나는 그것이 미로의 한가운데에 있는 정원에 이르기 위한 보편적인 절차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정원은 관광객들로 북적댔다. 한가한 정취를 느끼기에는 너무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나오면 나는 가능한 한 사람들이 적거나 없는 쪽을 선택했다. ‘천운용장’이라고 승천하려는 용 모습을 조소와 기와로 만들어놓은 걸 봤으니 점춘당은 지났을 것이다. 어쩌면 장서루였을까? 나는 동서양의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 한 서재에 당도했다.

그곳은 너무 적막하고 고요해서 마치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아직 오전이었는데 저녁 같았다. 착각이겠지만 나는 창문 사이로 낯익은 지붕들과 구름에 덮인 여섯 시의 태양을 보았다. 갑자기 겁이 났다. 거기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사람이 있었다. 치파오 차림의 여자가. 가슴이 철렁했던 기분은 곧 거의 유치한 행복감으로 바뀌어졌다. 오십대로 보이는 여자는 내게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웃으며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하는 것이다. 자신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정년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교수라고.

“선생께서도 정원을 보고 싶어 찾아오신 거겠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 정원을 보고 싶으니까 정원에 온 것 아닌가? 나는 다르게 대답했다. 출장 왔는데 시간이 남아 쇼핑가로 유명한 위위안샹청도 구경하고 샤오룽바오도 먹으려고 왔다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온 거라고.

여자는 웃었다. “시간은 셀 수 없는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갈라지지요.” 여자는 차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퇴임하면 뭐 할 거냐고, 차를 내는 여자에게 물었다. “은퇴해서 책을 쓰겠습니다.” 여자는 또 웃었다. “은퇴해서 미로를 만들겠습니다. 취팽의 정원을.” 취팽의 정원이라면 혹시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그 미로의 정원을 말하는 거냐고 나는 물었다. 여자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말입니다.” 나는 나중에 그 정원을 꼭 방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여자는 웃었다. “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요.”

나머지 얘기들은 비현실적이고, 하잘것없는 것들이다. 그 여자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푸둥 공항에는 어떻게 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부랴부랴 간신히 탄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막 이륙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곳이 바로 미래의 제가 만든 취팽의 정원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일부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다른 시간에 나는 지금과 같은 똑같은 말을 하지만, 나는 하나의 실수이고, 유령일 겁니다.”

** 컬러 부분은 모두 보르헤스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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