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평양 대화채널 열리는가…헬기사건 후의 미-북괴 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워싱턴=김영희 특파원】미군「헬리콥터」격추사건은 전례없이 신중하고 온건하게 해결됐다. 이 사건은 아마도 한국휴전협정 체결이후 미·북괴사이에 일어난 불상사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협조적으로 해결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 신문과 방송들은 성조기로 덮인 세 사람의 승무원의 관이 판문점에서 미군「앰블런스」에 옮겨 실리는 장면을 보고 사건처리의 속도가 놀랍다고 논평들을 했다.
결국 「카터」 대통령과 북괴 김일성은 이 사건이 철군계획을 후퇴시키지 않도록 하는 공동노력에 성공한 셈이다.
16일의 판문점에서는 1953년 이후 줄곧 그들이 사용하던 독설과 욕바가지는 등장하지 않고 넘어갔다. 16일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북괴경비병들이 미군경비병들에게 담배까지 권하는 모습이 미국에 방영되자 미국사람들에게는 대견하게 보였다.
사건자체가 이렇게 간단히 해결된 이상 관심은 이 사건이 앞으로 미·북괴의 관계개선의 역사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 귀절의 주석으로 그치고 말 것인가로 쏠린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존·사」기자는 판문점현장에서 경험있는 관측통들의 말을 인용하여 16일의 판문점회담은 『미국에 대한 북괴의 태도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전망하고 『북괴는 자기들을 불한당으로 보는 미국에서의 인상을 개선하는데 진전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따로 독립시켜보면 이런 견해는 지나친 낙관같이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전말을 한국전쟁 이래의 미·북괴관계의 역사의 조명 속에서 검토하면 「카터」와 김일성의 목적의식이 있는 자세는 놀라운 것이었고 그것이 이번 사건의 처리 하나로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지난 68년1월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69년4월의 EC-121정찰기격추사건, 76년8월의 도끼살인 사건때 「존슨」「닉슨」「포드」대통령은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미드웨이」호를 동해로 급파하고, 「팜」「오끼나와」와 미 본토의 전투기부대가 한국으로 이동했다. 미국의 이런 군사력 시위는 「카터」의 즉각적인 사과성명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번 사건에서 미국여론의 점수를 딴 김일성은 미국정부에게는 두 갈래의 기대를 걸고있는 것 같다. 하나는 미군철수요, 다른 하나는 「워싱턴-평양」의 대화이다.
철군은 「카터」대통령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서 북괴의 자극만 없으면 실현될 전망이다. 그러나 미-북괴 대화부분은 미국이 한국의 참여없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놓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북괴도 진지한 협상의 상대가 될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