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민의 갈증을 함께 나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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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방글라데지」에는 매년 연례행사처럼 홍수가 진다.
땅덩어리가 시루떡처럼 갈라져서 밀려 내려오는 물에 녹아버린다.
작은 돌멩이 한개도 없는 땅, 그것이 「방글라데시」의 국토다. 둑을 쌓고 물을 막으려해도 둑을 쌓을 돌이 없는 것이다.
자연이 이토록 짓궂을 수가 있을까. 일년에 한번은 반드시 홍수가 질 줄 알면서도 그들은 그 땅에 살수밖에 없다.
그들은 말없이 저항 없이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매년 그 홍수를 맞이한다.
흙탕물이 바다가 되어 땅 전체를 뒤엎고 쓸어간 뒤에 남는 것은 알몸뚱이·맨땅, 그리고 뜨거운 햇볕이다.

<가족이 수장 당한 할머니>
인간이 자연 속에 살고 있는 한, 끊임없는 자연과의 싸움이 계속될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살기에 꼭 알맞도록만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장이여서 그런가보다.
무더운 여름엔 차라리 추운 겨울이 좋다하고, 추운 겨울엔 뜨거운 여름이 차라리 좋다고 말한다.
비나 한 차례 퍼부어야지 어디 살수 있느냐고 입을 가진 사람은 모두 한마디씩 했다.
그러던 차에 비가, 그 기다리던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나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여서 사람들은 일부러 우산도 받지 않고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걸었다.
그러나 비에 젖은 그 옷을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홍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연의 위력을 과시하려는 듯이 집중호우를 내렸다. 끈질기고 줄기차게 내렸다.
끝내 산을 무너뜨리고 제방을 무너뜨리고 3백여명의 인명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집과 재산을 쓸어가 버렸다.
경부 경수전철이 두절되기도 한 이번 큰비는 얼마나 많은 혼란을 가져왔나.
턱에까지 출렁대는 구정물을 헤치며 푼푼이 모아 저금해둔 저금통장과 도장을 꺼내려고 물에 잠긴 집으로 들어가는 구로공단의 한 여공을 보았다.
젖은 웃을 입고도 목이 타들어 오는 수재민의 갈증을 아는가.
눈앞에서 온 혈육을 수장해 버린 것은 너무 오래 산 죄라면서 나이를 원망하며 통곡하는 할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는가.
축축하고 끈적끈적하며 질식할 것 같은 수용소의 밤, 아파서 잠 못 자는 어린아이의 보채는 소리를 들었는가.
한 평생을 바쳐서 사랑하며 키운 자식을 흙 속에서 잃고 홀로 남은 정년 퇴직한 아버지의 절망을 생각해보았는가. 이 갈증·통곡·아픔·절망은 바로 나와 똑같은 인간의 것이다. 그리고 또 나와 같은 민족의 것이다. 아니 내가 살고 있는 이웃의 것이다. 보다 좁히면 내가 언젠가 어디서 한번쯤 만난 일이 있었던 그 사람의 것이다.
아무도 남들만이 겪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내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따뜻한 보리차 한「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어제 한 소년이 입던 옷가지와 보던 책 몇권을 가지고 어느 수용소를 찾아갔다.
그것을 받아든 수용소의 소녀는 소년에게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수용소 문 앞에 봉숭아 씨를 심었거든. 이 다음에 꽃이 피면 따서 보내줄께라고.
그들은 꽃을 심는 여유를 가지고 불행을 극복하고 있다.
여간한 일엔 웃지도 울지도 놀라지도 않는 현대 도시인들의 마음에야말로 꽃을 심어주어야 할 것 같다.

<재난 극복할 용기 갖자>
홍수나 가뭄·지진·폭설·벼락 따위는 자연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이다. 그것은 또한 「자연의 암」이다.
인간은 영원히 정복되지 않는 자연의 핵·자연의 암을 상대로 끊임없는 자기개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폴로」나 「루나」가 우주를 개척한다해도 무한하고 막대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날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요원한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린 우리 친구인 인간끼리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설가>
▲42년 평남 진남포 출생
▲65년 서울대사대수학과졸업
▲67년 「동서춘추」신인소설당선
▲70년 「월간문학」신인상수상
▲창작집 『나는 어디에』, 장편 『빛깔 없는 애정』『빗속의 꽃잎』『유당』등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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