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제교역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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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앵도환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1948년11월의 일이다. 광목을 잔뜩 실은 모 무역회사소속 앵도환이 원산항 근처에서 북괴 측에 압류된 사건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간에는 물물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46년2월, 『통제품목 외엔 북한과의 무역은 자유』라고 한 미군정의 결정이 효시였다. 이쪽에서 보낸 것은 주로 광목·면화·생고무·「가솔린」-. 단기사용료란 명목이었다. 저쪽에선 대신 명태·오징어·비료·「시멘트」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런 정규교역보다는 역시 38선을 끼고 잠행되는 보따리장수들이 더 재미를 봤다.
그러다가 닥친 것이 48년의 5·14단전. 그나마 이어지던 남북교역도 끊기고 말았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11월 대북 교역을 재개했으나 「앵도환 사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앵도환 선주인 박모씨가 반 식민특위에 피체되자 북괴가 트집을 잡은 것이다. 친일파하고는 무역을 않겠다는 핑계였다.
배와 광목은 압류 당하고 승무원만 이듬해 봄에 돌아왔다.
이에 비한다면 동서독간의 교역은 꾸준한 바가 있다. 1947년1월18일의 「뮌헨」협정이 발단이다.
그러나 정작 교역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51년7월16일의 「베를린」협정이후. 지불단위론 VE(Ver-rechnungseinheit)라는 것이 채택됐다.
이 무역으로 덕을 본 쪽은 동독이다. 61년 현재의 통계가 그것을 입증한다. 동독의 대외무역총액가운데 9·3%가 서독을 향한 것이다. 반면 서독의 그것은 2%미만. 동독의 많은 공장이 서독의 기재와 설비로 돌아갈 정도였으니 알만하다.
서독의 수출품은 주로 철광·화학물질·공산품, 동독은 의류와 대맥이 대종이다.
그러나 이건 모두 협정품목에 불과하다. 체제가 다를수록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극도의 탈 정치를 전제해야 교역이 가능하고, 그러려니 협정품목이라야만 한다.
공산권의 경제가 폐쇄적이란 것도 또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공산권도 이젠 집권자 나름이다. 중공의 인민일보는 얼마 전 서방측 기업경영이 아주 합리적이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서방측의 선진기술과 「플랜트」도입을 반대하던 4인 방을 배외주의라고 까지 몰아 세웠다.
폐쇄주의의 어쩔 수 없는 좌절감을 실토한 셈이다.
7·4성명의 「제반교류」속에도 물적 교류가 함축되어 있긴 하다. 선의의 복지경쟁의 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괴가 그걸 한사코 외면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자유경제의 통풍으로 그 숨막히는 폐쇄사회에 구멍이 날까 두려워서다. 그래서 서울을 보고간 직후엔 직통전화까지 끊어버렸다. 마치 5·14단전 후에 앵도환을 압류했듯이,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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