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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계는 흐려져 가고 있는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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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내일 희생은 누구>
최근에 와서 한미관계는 상당히 흐려지는 감이 든다. 박동선 사건, 청와대에 대한 도청 혐의 사건 등 이 있은 뒤며 며칠 전에는 또 김형욱이란 사람이 미국의 하원 국제기구소 위원회 청문회에서 자신이 관계했던 대부분의 사건에 관해 증언을 하러 등장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정치에 관해서 문외한이라 자격이 없어서 김씨의「증언」내용에 대해 언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망명한 김씨의「증언」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드느라고 급급했겠지만 장본인은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누를 만한 어떤 것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내용을 감안해서 그「증언」의 진위를 평가해야 될 줄로 생각한다.
김씨의 편으로 본다면 조국을 배신하고「국가 기밀」을 팔아먹은 행위를 범한 것이나, 불행하게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끔 그런 흉측스러운 인물과 행위들은 있게 마련이다.
필자로서 제일 충격적인 것은 그런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또한 그 사람이 잡지나 신문 중에서 흥미본위의 기삿거리를 찾는 언론기관을 상대로 그「증언」을 했더라면 별로 놀라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을 상대해 준 그 기관은 그런 흥미본위 적 언론기관이 아니다. 한국과 우방 관계를 맺고 또한 동맹국인 미국, 그 행정부 바로 다음으로 중요한 국가기구인 입법부, 즉 하원에 속해 있는 한 위원회였으니 미국이란 국가가 김형욱을 상대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중대성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겠다. 이것은 한미관계를 훨씬 넘어선 것으로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오늘은 한국이지만 내일의 희생자는 어느 국가가 될는지 알 수 없다. 그때의 상황과 이해 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이 분명하다.
적대국가의 경우라면 그런 치사스러운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견의 차이가 생겼다 하더라도 필자의 좁은 소견의 탓인지는 모르나 우방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럴 수는 없다고 느껴진다.
미국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미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입장을 약화시켜 이 나라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야만 속이 후련할 것인가. 미국으로 말한다면 64년 이후 72년까지 월남전쟁동안에 한국군대의 지원이 필요한 때에는 아마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시기에 미국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오히려 조심도 하고 노력도 했다.
지금에 와서 한국에 부탁할 것이 없다고 그렇게 뻔뻔스럽고 치사스럽게 약소국가를 무시하고 그 주권을 짓밟는 것일까.
미국은 자신이 초강대국이라 해서 우방이나 동맹국이 필요 없고 무조건 추종하는 나라들만이 필요한 것인가.
식민지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이니 오늘에 와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비록 약소국가일지라도 주권 침해란 용납할 수 없으며 과거에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이런 사건을 묵인해야만 하겠는가.

<왜 굴복시키려는가>
더군다나 이번 사건은 선전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고 소위 공개 청문회로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흥미를 북돋워 주기 위한 것처럼 일부를 비공개로 한다는 사실까지 공개했던 것이며 한국·미국·세계 각국의 신문기자들을 다 동원했다. 세계에 진출하고 국제사회에 과감하게 등장하여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제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이 약한 대한민국의 성공은 미국이란 거인에게도 배가 아픈 것일까.
혹은 미국에만 의존하던 입장을 탈피하려는 한국 정부가 밉게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세게 전체를 살펴보아도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입장과 같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나라의 수난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초래한 결과인데도 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서방국가들의 태도는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지도에서 대한민국은 얼마 되지 않겠지만 이것은 3천5백만의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터전이니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이를 보호하려는 그들의 몸부림치는 노력은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하기는커녕 이를 저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유진영이니, 우방들이니 하면서 자유를 신조 삼아 산다는 그 나라들은 한반도가 제2의 월남이 되어야만 만족할 것인가.
필자는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기 위하여 무슨 정치공약을 했는지조차 잘 모른다. 한국에서 철군시킨다는 공약 정도를 알뿐이다. 한국에 관한 그런 공약을 지키느라고「카터」대통령은 고층이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대한민국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이 나라의 정부를 굴복시킬 심산은 아니겠지? 스스로「대국」이라고 우겨대는 미국으로서는 너무나 야비하고 비겁한 행위일 것이다.

<주권은 마찬가지>
미국 대통령은 또한 무엇보다도「인권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인권」만이 존재한다는 것일까. 국권, 나라의 주권이란 없는가. 한 나라에서 미국이 생각하는 식의 자유, 탄압의 철폐만이 인간의 권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국제사회에서의 한 나라의 주권, 그 나라가 피땀을 흘려 가면서 선양한 국위와 국제사회에서의 신용은 아무 가치도 없고 다른 나라에 의해서 짓밟혀도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다.
미국 대통령과 미국 국가인들 우선 남의 권한을 제대로 인정하고 이를 존중해 가면서 모범을 보여 주었으면 한다.
미국 정보기관에서 청와대를 도청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니 땐 굴뚝에서 그렇게 많은 연기가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번 사건도 한-미 관계를 떠나서 국제사회에서 엄격히 다룰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동찬><본명 roger leverrier 프랑스인 신부·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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