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관전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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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람은 권좌에 앉아 있을 때는 잘 모른다. 평가하기도 어렵다. 권좌를 물러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크기며 품격이 드러난다.
권좌에는 여기에 따르는 후광이 있다. 여기에 가려서 제대로 그 사람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권좌에 앉아있는 사람보다는 권좌에서 물러난 사람에게 민중은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권좌에서 쫓겨났다면 그에 대한 동정은 더 커진다.
이런게 인정이다. 따라서 아무리 욕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이라도 한번 권좌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얼마든지 조용한 야인생활을 즐길 수 있게된다.
사람들에게 건망증이 있어서 만도 아니다. 그저 이런 게 민중의 생리일뿐이다. 따라서 현명한 권력자라면 권좌에 앉아있을 때보다 물러날 때를 더 조심한다. 잘만하면 모든 구악이 다 씻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닉슨」의 경우가 그 좋은 예가 된다. 역대 미 대통령 중에서 가장 불명예스럽게 권좌를 쫓겨난 그에게 미국의 대중은 침을 뱉지는 않았다.
최근에 그가 가졌던 「텔리비전·인터뷰」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더 이상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중이란 이렇게 어느 나라나 순박하다. 그러나 대중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배신과 매국이다. 「닉슨」에 대한 비난의 초점도 국민의 신뢰를 저버렸다는데 있었다.
최근에 「뉴욕·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황당무계한 망언을 늘어놓았다.
그러한 정신분열자가 그만한 중책을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으며, 또 도피시킬 수 있었는지도 문제되어야한다.
그의 동기에는 짐작할 수 있는바 없지도 않다. 그는 정식으로 이민간 것도 아니다. 따라서 무한정 미국에 체류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미시민권을 얻자면 적어도 5년의 거주기간이 지나야 한다.
이런 법적 제한을 어길 수 있는 방법은 이른바 정치 망명권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슨 망언인들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아무리 미국사회가 너그럽다해도 부정축재를 하고 도피해 온 해외고관을 반기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웃사람들의 동정을 사고 「골프」장에라도 눈총 받지 않고 출입하려면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는 냥 위장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처럼 교활한 꾀를 부렸다해도 그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어야 했다. 곧 자기 나라다. 결국은 그는 망국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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