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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게리 베커의 경고와 2014년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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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2008년 9월 서울 여의도 한국노동연구원 복도에서 온화한 표정의 미국 노(老)신사가 기자에게 자신의 저서를 건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국의 고용시장은 참 딱딱합니다. 이대로 가면 취약계층이 더 어려워질 수 있어요.”

그가 지난 3일(현지시간) 타계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게리 베커 시카고대 교수다. 베커 교수는 노동연구원이 주최한 간담회에서 “고용시장의 경직성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했다.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것은 노동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가 내놓은 해법은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바꾸는 것이었다. 정규직에 대한 해고가 어려울수록 기업은 비정규직을 쓰게 되고, 그에 따른 고통은 비정규직과 같은 취약계층에 쏠린다고 설파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일자리 창출은 민간에서 주도해야 한다. 정부가 요술방망이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정부가 이끌지 말고 정부는 세제 설계나 최소한의 반독점 규제, 경쟁을 촉진하는 제도 설계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당시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었고, 정현옥 차관은 산업안전국장을 거쳐 근로기준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커 교수의 강연을 그들도 접했다. 그런데 베커 교수의 경고는 2014년에도 여전히 메아리로 남은 듯하다. 폐업할 지경이 아니면 해고를 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이 발의되는가 하면, 시간제 근로, 정년 연장과 같은 각종 고용정책을 정부의 주도 아래 밀어붙이는 모양새여서다. 법으로 특정 계층의 고용을 할당하고, 고용 형태를 공시토록 해 여론재판을 유도하는 듯한 제도까지 나왔다.

 하지만 비정규직 규모는 크게 줄지 않고 있고, 임금은 여전히 정규직의 절반 정도다. 여성 일자리도 반짝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그다지 좋은 일자리가 아니어서 언제 불만이 터져나올지 조마조마한 상황이다. “고용시장이 경직될수록 취약계층만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베커 교수의 2008년 진단이 어쩌면 이렇게 들어맞을까.

 베커 교수는 강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역할은 첫째 국가 내외의 안전보장, 둘째 사회안전망 관리, 셋째 과도하지 않은 적절한 규제 관리다.” 세월호 참사나 저소득층 일가족의 자살, 고용시장을 옥죄는 법안을 보면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정부가 자신의 생각이 요술방망이인 양 휘두르는 건 아닌지 베커 교수에게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깝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