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 <제55화>독립군 야사 신일|독립군의 분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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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22년8월 남만주 각 독립 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통의부의 성립을 본 것은 독립 운동의 큰 성사였다.
그러나 여러해 동안 각지에 흩어져 있던 단체가 모여 새 기구를 구성한 것이라 자연 각 단체 대표자 사이의 의견 충돌이나 마찰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령부관에 선임된 전덕원은 원래 유학자로서 을사 보호 조약 때는 국내 유림 지사들과 화원에 유약소를 설치해놓고 조약의 폐기 운동을 전개했으며 고향인 평안북도에서는 의병을 일으키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경술국치 후에는 만주로 망명해 대한 독립당의 간부로 항일 독립 전쟁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통의부 조직에 가담은 했지만 일부 신진 인사들과 의견의 차이와 또 부감이란 지위에 불만이 있어 자연 분쟁이 뒤따랐다.
여기에 일부 노년층 인사들이 그의 뜻을 같이하자 1923년2윌 환인현대황구에 따로 모여 의군부란 새 조직을 만들었다.
의군부는 주로 국내의 일군·경 파괴에 목적을 두었다.
1924년 8월8일. 의군부군무 총감이 된 전덕원은 유격 대장 이경일, 소대장 전일록, 정교 김상률 등으로 하여금 독립군 50여명을 인솔하고 국내 청성진 일본 경찰서 습격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독립 군부대는 그날 하오 6시쯤 압록강을 넘어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성진의 일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했다.
밤을 이용한 이 기습에서 순사부장 내전능효를 비롯해 일본 경찰에 상당한 숫자의 인적 피해를 입혔다. 독립군들은 또 면사무소·우편국·기타 관공서를 불태우니 일인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전선을 끊어 연락을 못하게 하니 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밤새도록 시위를 벌었다.
이튿날 새벽, 의주 경찰서와 신의주 경찰서로부더 수백명의 일본 응원군이 밀어닥쳐 피아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반나절 동안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독립군은 소수의 인원에다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일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격전 끝에 정교 김상률 이하 7명이 전사하고 소대장 전일록은 독립군 20여명을 지휘해 육탄전으로 가까스로 일군의 포위를 뚫었다.
탈출에 성공한 일군의 독립군들은 의주군 옥상면 삼봉산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부상자들은 마침 이곳에 사는 의사 백보득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한편 나머지 20여명의 독립군들은 유격 대장 이경일의 인솔로 압록강을 넘어 환인현 본거지로 이동 중이었다.
그러나 관전현포수하에서 통의부 소속의 김석하 부대의 습격을 당해 장집중·허승택 등 10여명의 희생자를 냈으니 독립군끼리 맞부딪친 이 사건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왕상면 삼봉산에서 대원의 부상을 완치한 전일록 부대는 다시 하산, 두 대로 나누어 일대는 박희원 부대와 합류하여 의주군 내에서 항일 활동을 계속했고 일대는 최영선 부대와 합류하여 천마산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무사히 본영에 귀환하였다.
이듬해인 1924년부터는 통의부와 의군부의 대립 분쟁 중에서 중립을 지키던 제1, 2, 3, 4, 5중대를 중심으로 참의부가 조직되어 무장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참의부·통의부 등 재남만 독립 운동 단체의 활동은 보다 더 원활하게 전개되었는데 l924년5월에 있었던 일본 총 독재 등 실의 습격 등도 이 참의부 소속 독립군의 활동이었다.
재등 총독 습격 사건은 재등 총독이 한국의 서북 방면의 실정을 살피기 위해 평북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평북 위원군에서 참의부 소속 독립군이 습격한 것을 말한다. 5월19일의 이 습격에서 재등 총독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그 일행에 준 피해는 대단히 컸다.
별표는 당시 국내 신문이 보도한 독립군의 국내 작전 횟수 집계다. 이 집계를 보면 우리 독립군의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느낄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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