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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소의 상고 제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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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법정의의 구현과 재판의 신속성은 재판을 떠받치는 두개의 기둥이다. 이 두 기둥 중 어느 한쪽이 결여되면 그 재판은 결코 정당한 재판일 수가 없다.
재판에 있어 신속성과 법정의의 구현은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구되어야할 덕목이다. 그런데 실제의 문제로 두 가지 요구란 자칫 충돌하는 것인 양 오해되는 경향이 없지도 않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최대로 살려 법 정의를 실현하자면 신속성이 희생되기 쉽고 재판의 신속성을 강조하다 보면 법 정의가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단순논리 말이다.
물론 이러한 상반측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정작 재판의 신속과 법정의의 실현을 저해하는 요소는 상호간보다는 다른 데에서 더 연유하는 것 같다. 소송절차의 번잡이라든가 비능률적인 재판제도라든가, 하급심재판 기록의 요령부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정부가 성안한 민사소송법개정안도 재판이 신속하려면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제한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재판청구권을 최대한 허용하면 신속성이 저해된다는 단순논리에 바탕을 두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소송촉진도 좋고 상고남용 방지도 좋은 일이지만, 이번 개정안처럼 상고를 제한해선 사실상 삼심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기본권이 제약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개정안에는 세 가지 경우에만 대법원에의 상고가 허용되고 있다. 법률·명령·규칙·처분의 헌법 및 법률위반에 대한 판단이 부당한 경우와, 대법원 판례에 상반하는 경우, 그리고 재심청구의 사유가 있는 경우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경우 중 재심청구의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재심청구를 하지 무엇 때문에 상고를 하겠는가. 그러니 이는 있으나 마나한 규정이다.
대법원판례와 상반하는 경우에 상고를 허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대법원판례가 없는 경우에 새로운 판례를 만드는데서 대법원 판결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미 판례가 성립해 있는 부문에만 상고를 받아들인다면 무슨 뜻이 있겠는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사건의 대법원상고를 허용하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대법원의 적정한 재판권 행사를 위해 어느 정도 제한은 불가피하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기본적으로 제약해선 안되겠다는 것일 뿐이다.
대법원은 법 판단의 본산이다. 법률의 단순한 적용뿐 아니라 판례를 통해 일종의 「해역입법」을 함으로써 법을 보완하고 활성화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의 법률문화가 만개 하느냐, 쇠잔하느냐하는 중추적인 책임이 대법원에 달렸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다.
대법원이 이러한 책임을 다하자면 불가불 소송을 통해 국민들과의 접촉이 활발해야만 한다.
어느 정도의 상고가 적정하냐 하는 건 산술적으로 제시될 성질은 아니나 현행 민사소송법상의 상고이유도 그렇게 방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대법원이 마련중이라는 민사소송규칙 안에 상고이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하도록 상고절차를 강화할 계획이라면 그에 더해 상고를 대폭 제한하는 법개정까지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의문이다.
그밖에 개정법안에서 담보제공 없이도 가압류·가처분을 가능하게 한 것, 감정인의 타인주거출입을 허용한 것, 중요사건의 신문공고제, 원·피고쌍방이 출석하지 않을 경우 상소취하로 간주토록 한 것 등은 소송진행의 촉진과 공연성을 위해 적정한 배려로 보인다.
민사소송법은 법의 기본체계와 국민의 이해에 직결되는 중요 법률인 만큼 국회나 정부나 법원이 모두 그 개정작업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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