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공산주의자가 자본가 의뢰 받아 제작 … 태생부터 기구한 작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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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호 24면

디에고 리베라가 디트로이트 미술관 벽면에 그린 벽화들 중에서 북쪽 벽의 그림.

‘몰락한 자동차 제국’ 디트로이트의 시립미술관(Detroit Institute of Arts)에는 이 도시의 옛 영광을 증언하는 유명한 벽화들이 있다(사진). 1933년 완성된 이들 벽화는 당시 디트로이트 산업의 구심점이던 포드 자동차 회사의 생산 현장을 힘차고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거대한 기계들과 노동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마치 웅장한 교향곡 연주처럼 느껴진다.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

지난달 말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라고 불리는 이 그림들이 미국 연방정부에 의해 국가 사적(National Historic Landmark)으로 지정됐다. 지난해 디트로이트시가 파산한 후 벽화를 포함한 미술관 소장품이 시(市) 채무상환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팔려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온 결정이다. 채권자들의 압박에 맞서 미술관을 지키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는 시민들에게 좀 힘이 될 수 있을까?

확실히 시민들의 명분에 힘을 실어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 사적 지정이 소유자의 변경이나 소유자가 작품에 취하는 조치를 제한하는 힘은 없다고 한다. 여전히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의 운명은 안개에 싸여 있는 셈이다. 그걸 생각하면 벽화의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가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진다.

사실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는 태생부터 뭔가 아이로니컬한 존재였다. 자본주의 미국의 대량생산 현장이 별 부정적인 뉘앙스 없이 장관(壯觀)으로 묘사돼 있는데, 그걸 공산주의자였던 디에고 리베라(1886~1957)가 그렸으니 말이다.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기도 한 리베라는 멕시코 벽화 운동의 리더로 유명하다. 그가 공공건물 벽화에 주력한 이유는 민중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미술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공황 때 루스벨트 정부는 뉴딜의 일환으로 궁핍한 예술가들을 고용해 서민들이 이용하는 우체국 등에 벽화를 그리게 했는데, 여기에는 멕시코 벽화 운동의 영향이 컸다.

리베라는 1930년 미국에 오기 전에 멕시코에서 자본주의 비판 벽화를 많이 제작했다. 그중에는 ‘월스트리트 연회’처럼 헨리 포드, 존 록펠러 같은 미국 경제 거물들을 희화화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바로 그 포드의 아들인 에젤 포드의 주문을 받아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를 그린 것이다.

마르크시스트 미술가가 자신이 풍자했던 자본가의 주문을 받는 것도 모자라 카를 마르크스가 비난했던 “노동자가 기계의 부속품이 되는 분업”의 현장을 거의 찬양조로 그려놓다니? 그것도 그런 분업과 대량생산 시스템의 최고조라고 할 수 있는 포드시스템(Fordism)의 컨베이어 벨트 조립 라인을?

사실 리베라는 미국에 왔을 때 그 거대한 도로, 다리, 고층건물들과 그들을 만들어낸 기계문명에 반해버렸다. 미국인 친구에게 “이 고속도로들은 당신의 아름다운 나라에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즉, 기계에 대한 마르크스적 견해를 고수하기에는 너무나 기계에 매혹돼 버렸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포드같이 기계문명을 선도하는 산업자본가들에 대해서는 좀 더 우호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리베라가 자본주의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후 그는 의뢰를 받아 뉴욕 록펠러 센터의 벽화를 그리게 됐는데, 거기에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모습을 커다랗게 그려넣었다. 결국 언론과 시민의 엄청난 반발로 그 벽화 작업은 중단됐다.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에서는 리베라가 특별히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보이지 않지만 노동자의 공헌과 힘을 특히 강조했다. 이것이 미국의 보수적 관람객들에게는 은근히 노동운동을 선동하는 메시지로 보여 심기를 건드렸다고 한다.

이런저런 배경으로 볼 때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는 모순된 요소가 뒤섞여 있는 흥미로운 아이러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자체가 아이로니컬하다는 점에서 절묘한 역사의 함축일 수도 있겠다. 산업의 쇠퇴와 방만한 재정으로 시(市)가 파산하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도시 공공미술로 제작된 작품이 자칫 사유재산으로 팔릴 위기에 처한 지금의 상황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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