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로(성대교수·문학평론가) 조해일(소설가) 대담|일상적 소재와 우화적 수법 시도가 늘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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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윤=근자에 이르러 소설의 기법이나 표현에 있어서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즉 종래의 고발성 문학이라든가 제학성 문학에서 탈피하여 극히 일상적인 주변문제를 다룬다 든가, 「리얼리티」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의인화된 우화적 수법 등의 다양한 시도가 그것이지요.
조=그러한 시도로서 우리들 삶의 원형 같은 것을 포착하려는 것이 바람직한 작가의 자세라 할 수 있겠지요. 서정인 씨의 두 편의 소설『나들이』(문학과 지성) 『귤』(한국문학)을 읽고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 두 작품은 똑같이 독자의 긴장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주로 그의 문체의 힘과 한국인의, 특히 지방 소도시인의 심리의 저 층을 천착하는 그의 시선에서 연유하는 것 같아요. 특히『귤』은 면밀하고 빈틈없는 구성과 설명 조가 불식된 행동의 진행만으로 이야기의 그늘들이 차차 벗겨져 가는 경제적인 수법에 의해 단편의 매력이 십분 발휘된 가작입니다.
윤=한말숙씨의『여수』(문학사상)도 새로운 시도의 작품이었어요. 2년간의 침묵을 깬 이 작품은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끼게 된 한 중년부인의 울적한 나들이를 통해 그녀의 애정윤리를 펴 보이고 있는데요. 다시 만나게 된 옛 남성으로부터 새로운 결합을 강요당하지만 기존질서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줄거리지요. 결국 지난날에 대한 회의가 강하면 강할수록 죽을 때까지 방황만 계속된다는 귀결입니다. 조선작 씨의『진눈깨비』(문학사상)도 주목되는 작품이었는데요.
조=한 신참기자와 한 고참기자의 지방취재 여행 중 일어난「에피소드」축으로 개인이 저항하기 버거운 어떤 조직된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작품이지요.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의 의미와 우리 삶의 정체를 파악해 보려는 시도가 즐거운 이야기 속에 전개되고 있더군요.
윤=이 작품이 보이고자 하는 것은「미스」전이란 아가씨의 다음과 같은 말속에 집약돼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어쩌면 그것은 개인과 조직, 개인과 제도, 또는 합법화되어 있는 폭력사이의 문제일수도 있었고, 아니 차라리 인간의 부조리한 존재양상에 걸리는 본래적인 문제일수도 있다』는….방영웅 씨의『만고강산』(월간중앙)은 기이한 화제를 담은 소설입니다. 약혼녀의 어머니를 만나 보니 홍등가에서 알았던 여인이라는 이야기인데 이 혼란 된 시대에 있음직한 한 단면을「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조=김성홍 씨의『눈오는 하구』(현대문학)는 아름다운 한편의 회화를 감상한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소년과 그의 병든 할머니, 눈 덮인 하구, 백조 떼의「이미지」들이 서로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고 있지요. 다만 그 속에 담겨진 이야기는 너무 낮 익은 것이란 느낌인데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너무 분위기에만 열중한 탓인 것 같아요.
윤=박완서씨의『상』(현대문학)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두 동창생의 20년만의 해후에 뭔가 있으리라는 기대가 깨어져 미완성의 작품인 것 같은 아쉬움이 따르더군요. 이 밖에 중년여인들의 낭만이 집안걱정으로 무산된다는 최일남 씨의『생활 속으로』(한국문학), 우화적 수법을 보여준 정연희 씨의『죄수와 비둘기』(문학사상)등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조=최창학 씨의『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문학과 지성) 김병총 씨의『달빛 자르기』(소설문예)도 재미있는 작품들이었어요. 전자는 이 시대의 우화 몇 토막을「에피소드」형식으로 보여주었으며 후자는『소설의 재미란 원래 이런데 있는 것이 아닌가』생각이 들게 하는 흥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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