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제54화 배재학당(55)-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제자·윤성열>윤성열|정동 골목 편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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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배재학당 학생들의 항일 감정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아주 강렬해 일인 학생들과 자주 편싸움을 벌였다.
특히 배재와 경성중학(현 서울고의 전신) 일인 학생들간의「정동골목 싸움」은 유명했다. 양교 학생들은 학교 위치상 아침·저녁으로 등·하교시간이면 정동 골목길에서 마주치게 마련이었다.
골목길에서 고의적으로 어깨를 스쳐 시비가 벌어지면 으례 혈투(?)의 편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일인 학생들과의 편싸움은 대부분이 고보보다는 학당측 학생들이 벌였다.
대표적인 예로 1916년 가을의 정동 골목 편싸움이 있다. 이 싸움은 배재학당의 4학년과 2학년 학생들이 싸움의 주동 역할을 했다.
김인묵(학당 8회)과 정태희(학당 10회)등 배재학생 4∼5명이 하학 길에 10여명의 경성중학 일인 학생들과 정동 골목길에서 서로 어깨를 스쳤다. 다분히 고의적인 이 같은 충돌은 배재측이 선수를 쓴 것이었다.
조그만 일인학생 하나가 버티고 나서면서 6척 키에 힘이 장사로 유명한 김인묵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욕설이 끝나기 전에 김군이 달려들어 일인 학생의 따귀를 갈겨댔다.
옆에 있던 일인 학생들이『와』하고 고함을 지르며 몰려들어 김군을 포위해 버렸다. 김군은 우선 포위망을 뚫고 나오기 위해 2, 3명을 단숨에 때려 누이고 배재학생들 쪽으로 달려왔다. 이때부터 육박전의 편싸움이 전개됐다. 배재학생들이 고함을 지르며 일인 학생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숫적으로는 배재 쪽이 적었지만 힘은 월등해 단숨에 모두 때려뉘었다. 길바닥에는 덩어리 코피가 낭자했고 일인 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골목을 진동시켰다.
도저히 불가항력적임을 깨달은 일인 학생들은 깨진 코를 움켜쥐고 나뒹굴다가 뿔뿔이 달아나 버렸다.
완전히 KO패를 당한 경성 중학 일인 학생들은 2일 후 30여명이 떼를 지어 배재학당 교문 앞으로 몰려와 다시 혈전을 청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1, 2학년 학생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일인 학생 패들에게 시비를 당한 배재학생들은 즉각 대적을 하지 않고 학교로 다시 뛰어들어와 상급생들에게 이 급보를 알렸다. 김인묵 등 4학년 학생 20여명이 떼를 지어 밀려나갔다. 정동 골목에서 당했던 패배를 설욕키 위해 벼르고 온 일인 학생들은 김군을 보자마자 기가 꺾여 버린 채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만 했다.
정동골목에서 워낙 호되게 당했던 그들은 김군이 앞에 버티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뿔뿔이 헤어져 달아나고 말았다. 경성중학과의 편싸움에 수훈을 세웠던 김인묵은 미국에 이민, 몇 해 전까지도 연락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소식이 없다.
1917년 초여름 숙명의 배재와 경성중학 편싸움이 또 정동 골목에서 벌어졌다.
배재의 정태희·박피득(고보 1회)이 하학 길에 5∼6명의 경중 학생들과 정동예배당 앞길에서 어깨를 부딪쳤다.
이번에는 일인 학생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키가 1m90㎝나 되는 박군이 집적거리며 달려드는 일인 학생을 걷어차며 주먹으로 따귀세례를 퍼부었다.
길바닥에 거꾸러진 것을 계속 녹초가 되도록 밟아댔다. 신음소리를 내며 뒹굴던 일인 학생은 가까스로 기어 도망쳤다.
1대1의 대결에서 완패하고만 경중 학생들은 감히 편싸움은 벌일 생각도 못하고 뒤를 슬금슬금 돌아보며 사라졌다.
다음날 경성중학 교장이 배재학당 신흥우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해왔다. 아마도 박피득에게 맞은 학생이 워낙 중태여서 학교에서까지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신 교장은『우리학교 학생들은 먼저 손을 대는 법이 없다』고 경중교장의 항의를 일축해버렸다. 두 학교 교장에게까지 비화됐던 배재·경중학생들의 편싸움은 그 후에도 정동골목을 무대로 자주 일어났다.
일인 학생들과의 편싸움에 기수였던 박피득과 정태희는 현재 생존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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