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제54화 배재학당(5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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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등보통학교>
배재학당은 1916년2월1일 총독부의 강압적인 교육령에 의해 「미션·스쿨」 중에서는 가장 먼저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됐다.
총독부의 정치적 탄압에 순응, 이제까지 애용해오던 교명을 「고보」로 바꿨는데 정규과목에서 성경을 제외시킬 것이냐의 문제는 배재학당이 설립이래 부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일부 선교사들은 차라리 학당문울 닫아버리자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또 이들은 그 같은 조치를 수락할 수 없다는 총독부의 「개정교육령에 대한 결의문」을 당국에 보내 강력히 항의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래 학원에 가해지기 시작한 일제의 정치적 탄압은 한일합방 이후 더욱 노골화됐다.
그래도 외국인 치외법권 때문에 머뭇거리던 총독부의 기독교사학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한 계기는 1916년12월의 소위 「105인사건」이었다.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해낸 이 사건은 압록강철교, 개통식에 참석하러 가는 「데라우찌」총독을 관천에서 기독교인들이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구실로 일제는 윤치호·이승훈·양기탁·유동세·안태국·임치정을 징역 10년에 처하는 등 기독교인 1백5명을 처형했다.
이때부터 총독부는 기독교사학의 탄압을 노골화시켜 전덕기 목사가 세운 청년학원(1914년)과 흥화·대성학교 등의 민족학교를 폐교시켰다. 오산·안흥학교 등은 이보다 앞서 폐교당했다.
1908년 사립학교령으로부터 시작된 일제의 사학 탄압은 1911년 교육령, 1915년 개정교육령으로 이어지면서 법령의 올가미를 씌워 나갔다.
배재학당도 이 같은 일제의 탄압으로 1913년 예비과 l년, 중학과 4년, 대학과 4년이던 학제를 별과 1년, 고등과 4년으로 격하시켜야 했다. 일제의 교육령은 한국인의 민도에 맞아야한다는 구실로 보통학교(국민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중·고교) 4년으로 수업연한을 단축시켰다.
또 총독부는 일어교육이라는 명목아래 감시원으로 사립학교에 일인교사를 강제 배치했다.
배재학당에도 신산행태낭이라는 일인교사가 1915년부터 배치됐다.
「고보」로 간판을 바꾸고 성경과목을 빼야하는 일제의 교육령에 크게 고민하던 감리교선교부는 학교를 계속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12년부터 제4대 학당장으로 취임한 신흥우 박사도 총독부당국의 눈길을 피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과외로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신 박사는 이 문제로 총독부에 매수돼 기독교 정신을 망쳐버렸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었다.
교명과 학제문제는 배재학당과 배재고보를 병존시키는 이원적인 방법을 택했다. 즉 학생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학당이나 고보쪽을 택해 수학하도록 했다.
그래서 1916년 인가된 고보는 재학생들에게 학당에 남아있을 학생은 그대로 남아있고 고보로 가고 싶은 학생만 등록을 시켰다. 첫해에는 졸업반학생 21명 중 5명만이 넘어갔으나 해가 갈수록 더 많은 학생이 고보쪽으로 갔다.
김계선·김명선·김유배·박피득·최명현 등이 첫해에 넘어간 고보 제1회 졸업생(1917년)이었다. 이들도 현재는 거의가 별세했다. 다음해 고보쪽으로 넘어가 제2의 졸업생이 된 사람으로는 신흥우 박사의 비서였으며 현재 생존해있는 이건춘, 작고한 문인 나도향 등이 있다.
신흥우 박사가 고보인가를 수락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길을 열어 주자는 것이었다. 학당은 정규인가학교가 아니라서 전문학교응시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신 박사는 배재학당을 고보로 인가 받을 때부터 친일파라는 일반의 의혹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5남매가 동시에 홍역에 걸리고 자신의 지병인 치질이 재발, 평양 기방병원에 입원함으로써 더욱 의심을 받았다.
측근들도 그의 거동을 의심하게 됐고 학교일을 의논코자 찾아간 교사들의 면회까지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한교라는 교사 1명을 제외하고 교사전원이 그를 교장직에서 파면하고 인천에 선교사로 와있던 「아펜젤러」 2세를 영입하자는 연판장을 만들어 이사회에 제출했다. 이렇게 돼 신 박사는 1920년1월 배재학당장직을 권고사임 당하고 말았다. <계속><제자 윤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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