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제자·윤성렬>|<제54화>배재학당-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50)-배재학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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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독교연합대학인 배재대학이 1912년4월 배재학당 안에 설치됐다.
「아펜젤러」와 「언더우트」교사가 시작한 한국의 기독교 교육사업이 크게 성공을 거두자 미북감리회는 한국에 각 교파연합대학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서울 미선교사 연합교육위원회에 이를 제의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이같은 대학을 세우자는 뜻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설립장소 등을 둘러싼 각 교파간의 주강과 이해는 서로가 달랐다.
장로교선교사들은 서울에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며 평양에 숭실대학만을 두자는 것이었다. 또 같은 장로교이면서도 북장로교는 서울경신학교에 설립하자는 주장이었다. 반면 감리교는 배재학당 안에 설치할 것을 강력히 고집했다.
결국 미국기독교 외국선교부는 세밀한 장소조사와 여론을 종합한 끝에 서울배재학당으로 설립장소를 정했다.
그러나 설립 후에도 장로교측은 배재학당 안에 설치돼 「배재대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불만, 경신학교로 옮길 것을 계속 고집했다.
그래서 장로교 「베커」선교사는 기어이 기독교 연합대학을 종로기독청년회관 아래층으로 옮겨갔고 선교사들간의 충돌을 일으켰다.
장로교측은 1916년4월 기독교 연합대를 다시 경신학교로 옮겨가는데 성공했고 이 때부터 감리교측은 사실상 손을 떼고 말았다.
배재대학 설립초기의 교수진은 「헨리·D·아펜젤러」·「호레이스·G·언더우드」· 「애비슨」·「케이블」·백상규·신흥우·김규식·윤치호·신봉휴·최오환·강매·유병민 등이었다.
학생으로는 민용호·여운홍·한익수·최경희·박금성·김동혁 등이 제1회 입학생이었다.
감리교와 장로교간의 알력으로 4년제였던 배재대학은 제대로 졸업생을 내지도 못한채 끝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스포츠」의 첨단을 달리던 배재학당에 야구반이 설치된 것은 1911년 봄이었다. 우리나라 야구의 효시는 1907년 황성기독청년회 총무인 「질레트」선교사가 청년회원을 모아 가르친데서 비롯됐다.
배재 야구「팀」은 1912년 오성중학「팀」과 첫 시합을 가져 대승했다. 1910년 한일합방전의 우리나라 야구「팀」은 배재·한성고교·황성기독청년회 등 3개「팀」밖에 없었다.
당시의 야구는 선도 적당히 그었고 외야수는 「글러브」를 끼지도 못했다.
1922년9월 조선체육회주최 제3회 야구대회 중학단에서 배재는 전승의 휘문「팀」을 꺾어 야구「팬」들을 열광시켰다. 당시 「코치」는 마춘식씨였고, 투수는 장의식군이었다. 박석윤씨가 배재·휘문의 11회 대전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운동 평의 시초였다.
1942년11월에는 보성전문「팀」DMF 물리쳐 배재의 야구 실력은 「스포츠」계의 큰 화젯거리였다.
당시 투수는 장용준군이었고 포수는 성용화군이었는데 이들은 「조선 제1」의 「배터리」로 명성을 날리던 선수였다.
배재학당은 1913년4월 일본총독부의 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 교원양성을 목적으로한 수업연한 1년의 별과를 설치했다. 다음 해에는 역시 수업연한 1년의 비수과로 이름을 바꾸어 학당 졸업생들에게 교원자격을 취득할 수 있게 했다.
이같은 학제의 신설은 총독부가 외국선교사들의 사립학교 경영에 일면 호의를 베푸는체 하면서 내면으로는 학교감시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일합방 후의 「데라우찌」총독은 철저한 식민지 교육정책을 실시, 노예적인 심부름꾼을 만드는 실업교육으로 일반의 이목을 호도했다. 기술부문에서도 고급설계는 반드시 비밀로 하여 한국인은 배우지 못하게 했고 『실업과 직업을 주어 먹고살게 한다』는 술책을 썼다.
3·1운동 이전까지의 한국내 일인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나 취학인구 비율은 1만명 당 한국인이 1명인데 비해 일인은 1백13명으로 엄청난 차별교육을 실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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