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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 배재학당 (22) 이승만의 입학 윤성렬<제54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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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거목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은 1894년 11월이었다. 당시 이박사는 이미 문과 과거에 몇번 실패하고 결혼까지 하여 득남을 한 20대의 어엿한 청년 선비였다.
배재학당 입학은 유년시절부터 의형제로 지내온 신흥우형제의 간곡한 권유에서 비롯됐다.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 등이 잇단 가운데 과거제도가 없어져 버리자 이박사는 과거를 향해 달리던 청운의 꿈을 상실한채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15년동안 배우고 닦아온 한학공부가 아무 쓸모 없이 돼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며 공상에 잠겨있는데 하루는 신흥우의 둘째형 긍우가 찾아왔다.
이박사는 그들 3형제 중에서도 같이 서당을 다녔고 나이가 비슷한 긍우와는 친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원래 이들 두집안은 그들 부친인 이경선씨와 신면휴씨도 흉허물없이 지내는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긍우는 이박사에게 배재학당에 나가 서양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신학문과 개화를 배우라고 권했다. 긍우는 이미 몇달전부터 가끔 배재학당에 나가 선교사들의 강의를 청강, 신학문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박사는 아직도 과거에 대한 집념과 과거에 합격해 출세하기를 바라는 아버님의 너무나도 큰 기대를 비록 시운이 지나간 것이긴 했지만 선뜻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긍우의 권유에 확답을 못내리고 고민을 했다.
며칠후 긍우가 다시 찾아와 『아직도 결심을 못했느냐』면서 간곡히 설득했다. 『입학이야 하든 않든 나의 간곡한 청이니 배재학당에 한번만 나가보세. 우리생각과는 딴 세상이며 신비한 학문일세. 』 긍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강권(?)을 했다.
이박사는 형제같은 친구의 간곡한 권유를 더이상 거절할 수도 없고 배재학당이 대체 어떤곳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일단 한번 가보기로 승낙했다.
다음날 아침 이박사는 도포와 큰 갓에 굽 높은 나막신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지우와 함께 정동고개 배재학당 문을 들어섰다.
긍우는 먼저 미국인 교사「노블」에게 이박사를 소개했다. 「노블」선생은 반기는 낯으로 앞에 서서 교실마다 안내를 해주었다.
처음 들어간 곳이 기도회실이었다. 이박사는 긍우에게 『저것이 천주학이지』하고 물었다. 긍우는 『그건 기도라는 것일세』라고 대답하면서 혹시라도 「노블」선생이 알아들을까 하여 얼굴을 찌푸렸다. 다음에 들어간 곳이 북학반 교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세계지도를 걸어놓고 한국의 위치 등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박사는 여기서 긍우가 말했던 신학문의 「신기함」을 느꼈다.
마지막 들어간 교실에선 영어수업을 하고 있었다. 꼬부랑 글씨를 처음 본 이박사가 『저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긍우는 『서양사람들이 쓰는 글자일세』라고 귀엣말로 대답했다.
『그래 무슨 글씨가 모두 저렇게 꼬불꼬불한가』라며 이박사는 신기해했다. 두사람은 점심시간이 되어 학당문을 나왔다. 나란히 걸으면서 긍우가 『그래 어떤가』하고 물었다. 『자네말 같이 꽤 배울 것도 있어 보이네.』이박사의 대답이었다. 두 사람은 다음날 다시 학당문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대천문앞에서 헤어졌다.
이박사는 집에 돌아와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며 갈등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학당 입학을 내심으로 결정했다. 다음날 학당에서 긍우를 만나 간단한 절차를 밟은 후 배재학당 학원이 됐다.
그러나 서구의 문명과 문학·학문·영어가 필요함을 깨닫고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박사의 야망은 처음에는 그렇게 순탄하질 못했다. 부모의 반대를 우려해 매일 아침 행선지도 고하지 못하고 몰래 집을 나서 학당으로 향했다.
배재학당 학원이 된 줄을 까맣게 모르는 어머니 김씨는 아들이 공부를 포기한채 타락한 줄만 알고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와했다. 얼마동안을 이렇게 집안 몰래 다니다가 하루는 어머님께 사실을 고했다. 어머님은 크게 탐탁스러워하진 않았으나 『네가 알아서 하는 일이니 말리지는 않겠다』며 마지못해 승낙을 해주었다.
이렇게 돼 이 박사는 4년동안의 배재학당 학창생활을 통해 혁명가로서의 인생관을 굳혔고 선각자적인 세계관을 정립했다. 배재학당은 갈림길에 섰던 이박사의 청년시절을 역사적 인물의 길로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됐음에 틀림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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