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촌 새 풍속기>(10)-증권회사 진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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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 반포「아파트」상가에 자리잡은 좁은 사무실. 한쪽벽 전면의 푸른 칠판, 빽빽히 메워진 숫자들을 한 청년이 의자 위에 서서 쉴 사이 없이 고쳐 적는다. 구석「스피커」에선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숫자들이 불려진다. 병원 대합실처럼 긴 「소파」들이 대여섯개 줄을 서 칠판을 향하고 있다. 지난 음력설날, 한산한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7, 8명의 주부들이 「소파」에 앉아 열띤 표정으로 칠판에 눈을 모은다.

<작년의 2배 이상 거래>
주식시세를 보는 눈들. 서울 번화가에서 담배연기 자옥하게 신사들만 모여있던 증권시장에 요 몇년 사이 눈에 띄게 여성들 발길이 잦아졌고 이제는 주택가「아파트」지대에 하나 둘 증권회사 지점이 생겨났다.
서울 반포에 2군데, 여의도에 3개, 한강에 1개, 영동에 3개 등 「아파트」상대만 9개지점이 신설돼 『집집마다 주식「카드」 갖기』라는 증권회사 전략이 펼쳐지고 있다. 보통 이런 증권회사 지점들엔 3백∼4백명의 고객들이 몰려있고 특히 「아파트」지역이라 80%이상이 주부 고객들이다.
『요즘 모두 남편 월급으로만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런데로 관심이 쏠립니다. 여의도 삼보증권 지점 어느 직원은 『올해들어 부쩍 손님이 늘었다』고 말한다. 작년의 2배 넘는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
「아파트」촌 9개지점이 작년에는 한달 평균 32억원 정도가 거래됐는데 올해는 1개 지점에서 한달에 10억원 넘게 거래되고 있다.
반포에서는 하루에 현금만 2억원이 쏟아진 때도 있었다.
대개 30여명 앉을 자리가 마련된 「아파트」촌 지점들엔 드나드는 손님도 모두 이웃 아는 얼굴들. 집안의 돈을 늘린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은 아예 「시내」로 들어가거나 전화주문으로 거래하고 여기 나와서 의자에 앉아 칠판을 보는 층은 대부분 소규모 투자자들이다.
『처음엔 정말 얼굴이 화끈해서 들어오질 못했어요. 한 6개월 지나야 내 집처럼 수시로 드나들면서 시세를 볼 수 있어요.』 벌써 7년째 증권투자를 해왔다는 김모부인(39·한강「맨션」12동)은 요즘 하루도 빠짐없이 지점에 들른다고 했다.

<액수 많을수록 비밀로>
주부들은 장바구니를 든채, 또 학교에 나가는 길에 손쉽게 들어가서 시세를 살피고 동회직원도, 이웃학교 교사도, 동네 의사도 「잠깐씩」들른다. 여기에 「상주」하는 주부들도 적지 않아 한군데서 20명 정도는 『출근한다』는 말을 쓸 정도. 여의도에 살고 있는 어느 교수부인은 『친구끼리 만날 약속도 다방 대신 증권시장으로 한다』고 말했다. 친구와 이야기하면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시세를 피부로 잡는다는 설명이다.
한국에서 주부들이 「돈을 늘려야 하는」 이유와 상황은 정말 각양각색 복잡하지만 돈 늘릴만한 주부가 많이 모인 곳이 역시 「아파트」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우선 돈을 늘릴만큼 여유가 있다는 상황을 제쳐놓고라도 돈 쓸 일이 많은 곳이 「아파트」 살림이고 교육수준 높은 층들이기 때문에 더욱 주부들이 활동하고 싶어 해 이런 투자로 쏠린다는 진단이다.
『이제는 장롱 속의 돈이 증권「카드」로 옮겨진다』고 전문가들은 외국의 예를 들어 전망하고 있다. 8·15해방 후 소위 「돈늘리는 방법」이 곗바람에서 사채놀이로, 그리고 부동산투기로 파도를 탔는데 이제는 「주식」으로 바람이 뭍었다는 판단이다. 「아파트」에까지 바람이 불었으니까.
『주식투자는 처음 시작이 어려워 공부를 해야됩니다.』「증권바람」 때문에 「아파트」 주부들이 경제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이미 2, 3년전부터. 갑자기 경제 전문지 구독이 늘고 서울 충무로 일본서 책방에는 주식관계 책들이 부쩍 많이 입하됐다. 어느 경제지는「아파트」주부들의 요청으로 조간신문인데도 불구하고 저녁 8시쯤에 미리 배달, 밤늦게까지 「공부하고」아침에 증권시장에 나갈 수 있게 했다.
『요즘은 신문을 봐도 정치면과 경제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요. 그래서 사회면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예요.
어렵다는 경제용어를 일상 대화에서 쓸 정도의 주부들은 『주식투자도 결국 정치가 크게 좌우한다』는 경험론을 펴고 있다.
지난 8·18사건 때는 지점에 모인 주부들이 모두 귀에「라디오」를 꼽고 앉았고, 대통령연두회견 전날에는 신문사에 전화 걸어 『혹시 어떤 내용이 나올 것이냐』고 정보를 캐려는 정도로 전문화되고 있다.
증권시장 「스피커」에서 쉴새없이 시세가 방송되는데 가끔 정전이 되면 「아파트」 단골들은 쏜살같이 밖에 나가 「택시」를 타고 시내거래소로 달린다.
『매시간 변하는 시세기 때문에 궁금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지요.』 어느 주부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면 『시세가 좋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아파트」촌 지점에 드나드는 손님들은 대개 20만∼30만원 정도로 증권을 시작한다. 어린이 저금통을 깨서 사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집을 팔아 크게 거는 사람도 있다. 1만∼3만주를 가진 주부도 상당수라고. 회사측에선『거래를 비밀로 하려는 사람일수록 몇천만원대의 큰 고객』이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금리보다는 나은 것 같아 증권을 시작했어요. 눈감고도 연30%이윤은 얻을 수 있어요. 4년째 주식투자를 한다는 곽모부인(39·반포63동)은『매달 생활비를 번다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손해 안보는 요령』이라고 일러준다. 『「붐」은 일었지만 아직도 진정한 투자를 몰라 부작용이 생긴다』고 어느 증권회사 간부는 한국적인 투기성을 걱정한다.

<아무래도 금리 웃돌아>
모두가 금방 샀다가 금방 팔아버리는 투기에 쏠린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정부규제가 심해 큰 「파동」은 없다지만 「아파트」주식시장에서도 몇백만원씩 손해봤다는 집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 돈을 벌었을 때는 소문내도 손해봤을 땐 숨긴다. 『주가가 오를땐 다 이득을 보지만 떨어질 때는 80%가 손해본다』는 것이 10년 동안 주식「그래프」까지 그리면서 해왔다는 어느 부인의 분석이다.
결국은 「투기」이기 때문에 이것이 미국이나 영국처럼 주부들이 주식 들고 장보러 가는 「생활」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부동산이니 곗바람이니 하는 것처럼 우리 식의 「바람」이 될 것인가는 그래도 아직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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