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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아픔 사라지진 않아 … 상처와 함께 사는 법 익혔을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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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수묵화풍으로 그려진 ‘피부색깔=꿀색’의 주인공 소년 융(왼쪽)과 융 감독을 합성한 이미지. 그는 “내 그림에는 여러 문화가 섞여 있다”며 “동양과 서양 두 문화의 중간에 있는 나 자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미루픽처스]
융 감독 [사진 김진솔(STUDIO 706)]

“입양아라는 이유만으로 나 자신을 불쌍한 피해자로 그리기 싫었다. 난 불행을 불평하기보다 그에 맞서 싸우는 걸 더 좋아한다.”

 첫 장편 애니메이션 ‘피부색깔=꿀색’(원제 Couleur de peau: Miel, 5월 8일 개봉, 융·로랑 브왈로 감독)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29일 내한한 벨기에 감독 융(48)의 말이다. 수묵화풍의 그림으로 이어진 이 작품은 1971년 다섯 살 나이에 벨기에로 입양된 한국 소년 ‘전정식’의 이야기이자, 융 감독 자신의 이야기다.

 입양아로서 소년 융이 느낀 고민과 혼란이 진솔하고 뭉클하게 그려지는 수작이다. 작품 제목은 그의 입양 서류에 적힌 표현에서 따왔다. 아시아인은 피부색을 보통 노란색으로 표시하는데, 그의 서류를 담당했던 이는 ‘꿀색’이라고 시적인 표현을 썼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만화가로 활동해 왔다. 정체성의 문제는 화려한 판타지 만화를 그릴 때부터 즐겨 다뤄온 주제 중 하나였다. 그런 가운데 “더 이상 허구를 통해 나 자신과 숨바꼭질을 하지 말자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세 권으로 발표한 동명의 만화가 탄생한 배경이다. 첫 권이 나온 직후, 프랑스인 로랑 브왈로가 그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생각을 발전시킨 끝에 ‘피부색깔=꿀색’을 공동연출로 완성했다.

 이 작품은 융 감독의 과거를 단순히 극화한 작품이 아니다. 어릴 적 벨기에 가족들과 찍은 실사 영상, 2010년 첫 한국 방문 때 찍은 영상, 한국 아이들의 국제 입양에 대한 기록 영상 등이 애니메이션 중간 중간 등장한다. 감독의 말대로 “이야기가 지닌 여러 겹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다. 그리하여 그의 경험은 기억과 기록, 꿈과 감정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넘나드는 기록으로 확대된다.

 융이 벨기에에 입양되던 해, 그 마을에만 10여 명의 한국 아이들이 입양됐다. 융의 부모도 몇 년 뒤 11개월 난 한국 여자아이 발레리를 또 입양했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 소년 융은 다른 입양아들을 모른 체하고, 동생 발레리를 못살게 군다. 자신은 일본에서 왔다며 일본 문화에 심취하기까지 한다. 점점 엇나가던 소년은 급기야 집을 떠나 살기로 결심한다.

 ‘피부색깔=꿀색’은 주인공 융을 비롯한 모든 인물과 입양이라는 상황을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때때로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융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일수록 정직해야 한다”며 “난 어렸을 때 활동적이었고, 가끔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었다. 그 모습을 반드시 그려야 했다”고 설명했다. “어렸을 때 난 한국에 화가 나 있었다. 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2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을 해외에 입양시켰다. 그래서 복수하는 마음으로 한국을 침략했던 일본을 좋아했다. 하지만 결국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나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잃어버린 뿌리와 지금 속한 세계 사이에서 소년 융이 느끼는 혼란은 결국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친어머니에게 버려졌다는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그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평생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입양아들을 향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삶이 가로막혔다고 느끼는” 세상 모든 이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다. 그의 삶에서 진솔하게 우러나온 이 위로는 보는 이를 꽤나 가슴 먹먹하게 만든다. 국내 개봉에 앞서 세계 3대 애니메이션 영화제라 불리는 프랑스 안시·브라질 아니마문디·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모두 굵직한 상을 받았다. 전체 관람가.

장성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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