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생명과 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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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 어머니가 성서의 이름으로 어린 딸을 죽게 했다. 능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수혈을 거부한 때문이었다. 무지가 탈이었을까, 광신이 탈이었을까, 아니면 비정이 탈이었을까.
「창세기」에 보면 피는 창조자인 신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또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한다. 사람이 피를 「식용」으로 쓰지 못하게 된 것도 이런 때문이다.
이런 피의 식용금지는 「노아」의 칠계명 중에도 들어있다. 그리고 피가 영으로 여겨진 때문에 혈액령(Blood-Soul)의 관념을 낳기도 했다.
이밖에도 피는 기독교에선 여러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피는 인류의 속죄를 상징한다. 그것은 또 공희의 종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피는 죽음과 출산의 위험과 관련되어서인지 거기 얽힌 여러 가지 금기가 많기도 하다. 구약성서에는 피가 흐를 때에는 이를 흙으로 조심스레 덮어두라고 이르고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남의 피를 받아써서는 안 된다는 대목은 아무 데도 없다. 도시 수혈이란 게 성서의 시대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의사는 또 어떠했을까.
미국과 「캐나다」의 간호원 1만명을 상대로 한 「앙케트」에서 자기병원의 환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회답이 38%나 나왔다고 한다.
의사의 과실로 환자가 죽는 예를 본 간호원이 42%나 된다니까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환자나 그 가족에 대한 인간적인 손길을 펴는 의사가 23%밖에 없다는데 보다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여호와의 증인」의 어머니가 수혈을 거부하자 의사는 그 어머니에게서 각서를 받았다. 두 병원이 다 그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병원 쪽의 과실이 아닌데도 어린이가 죽었을 때 혹시나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는 경우에 대비해야만 했을 것이다.
수술을 하게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마음의 부담을 안고서는 냉정한 수술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그런 다급한 상황 속에서 각서를 받아내는 의사의 비정을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정말로 수혈이 불가능했었을까.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수혈을 하고, 그런 다음에도 결국 어린이가 죽었을 경우를, 혹은 의사는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만약에 이런 주저로 수혈을 못한 것은 아닌가 한번 되새겨 볼만한 일이다.
결국 어린이는 죽었다.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생명이었다. 딸의 죽음을 바라는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그 어머니도 모든 게 끝난 다음에도 딸의 죽음을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새삼 「광신」이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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