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인간 안보' … 국가 안보만큼 국민 안전도 챙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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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세월호 침몰 참사를 겪으면서 안보의 개념이 ‘국가’가 아니라 ‘국민’ 개인에게 맞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인간 안보(human security)’ 개념으로 전환이다. 인간 안보란 개념은 민간인 보호가 국가 안보라는 큰 담론에 희생돼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1994년 처음으로 인간 안보라는 단어를 썼다. UNDP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안보 위협으로 규정했다. 냉전 종식 이후 다른 국가의 침입보다 재해·범죄·인권탄압과 같은 내부적 요인으로 인한 국민 희생이 더 커진 상황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안보의식은 여전히 냉전 시기에 머물러 있다. 북한이라는 위협이 존재하는 한반도의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세계적·시대적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국방예산은 34조3453억원이다. 재난관리 등 안전 분야 총 예산(9840억원)의 35배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또한 ‘북한 대응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안보란 국가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고 개인의 안전과 안보를 동렬에 놓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정부 내 공감대”라는 한 당국자의 말이 현재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3000여 개에 이르는 재난 매뉴얼이 세월호 사고 때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 정부가 ‘안전’을 ‘안보’와 분리해 취급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각국은 이런 인식하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다. 영국은 매해 국가위협평가(NRA)를 실시한다. 향후 5년 동안 국민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비상 상황을 모니터링해 심각성의 순위를 정한다.

 러시아는 비상사태부(Ministry of Emergency Situations·EMERCOM)가 국민이 처할 수 있는 모든 위협에 총괄 대응한다. 재해, 전염병에서부터 테러, 방사능 누출 사고까지 다양한 분야를 맡는다. 지난해 운석이 떨어졌을 때도, 한파로 동사자가 속출했을 때도 대응을 맡은 곳이 비상사태부였다.

 미국이 냉전 종식 이후 국가 이익 자체를 재설정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도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소련이란 적이 사라진 국제환경에서 정부가 국익의 우선 순위를 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초당적 합의로 탄생한 국가이익위원회(Commission on America’s National Security)는 1996년, 2000년 두 차례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관여해야 하는 국익을 단계별로 설정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도 국민 안전을 중심으로 안보 위협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좋다는 제도는 다 들어와 있는데 문제는 규범과 실제 행동의 비동조화(decoupling)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공급자 입장에서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희망적인 구상만 하지 말고 수요자 입장에서 정책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화여대 국제학부 박인휘 교수는 “우리나라에도 인간 안보라는 이론 자체는 들어왔지만 정책 실천으로 이어질 만한 환경은 조성된 적이 없다”며 “안보 정책 수립은 무엇을 위협으로 놓느냐에서 시작되는데 이 부분이야말로 각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유지혜·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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