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든」 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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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앤터니·이든」경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인물이다. 한국의 동난과 휴전을 에워싸고 그는 미국 다음으로 우리나라에 깊은 발자취를 남겨주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한국의 처지에 대해 마음으로부터의 동정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한반도를 「유럽」의 「베넬룩스」와 비유하고 있었다. 대국들의 정치적인 각축장이 되고 있는 점에서 흡사하다는 것이다.
「베넬룩스」도 「유럽」의 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한때는 콧잔등이 아물 날이 없었다. 한반도도『소련·중국·일본·미국 등과 같은 강대국이 에워싸고 있어서 언제나 큰 물결이 밀려드는 싸움터』 라고 그는 『회전록』 에 서술하고 있다.『자유는 귀중한데, 이를 위한 대가가 비싸다는 것을(한국민족이)배운 것은 처음이 아닐 것』이라고 한 그의 말은 우리의 뼈에도 사무친다.
아뭏든 그는 한국휴전에 남다른 공헌을 한바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을 위해서 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든」경은 한국 전쟁이 압록강에서 끝났다면 필경 전쟁은 다시금 더 큰 규모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었다. 「이든」 경은 『회고록』에서『공산주의와 자유세계가 함께 수락할 수 있는 「현상유지」(스테이터스·쿼)가 가장 적당한 평화의 방편일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든」은 「처칠」수상이 은퇴하면서 그 뒤를 이어 1955년 4월 5일 수상 직에 올랐다. 명문 「이튼」, 「옥스퍼드」를 거쳐 「오스틴·체임벌린」외상의 비서로 외교적 경륜을 쌓고, 「처칠」의 사사를 받기까지 수상이 되는 정규 「코스」를 빈틈없이 밟은 셈이다.
그는 국방상을 하면서도, 다시 외상직을 두 번이나 맡으면서도 『모든 성공적인 국제협상의 본질은 타협에 있다』는 그 나름의 정치철학을 벗어난 일이 별로 없었다. 이런 그의 정치적 신조는 「제네바」회의에서「인도네시아」의 휴전을 성립시켰으며, 「유럽」방위공동체를 만들었다. 오늘의 서독을 재 무장시키는 데에 팔 걷고 나선 것도 바로 「이든」경이었다.
그는 독일의 재무장이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럽」이 무방비 상태에서 당할 위험을 생각하면 그것은 적은 위험에 불과하다고 갈파했었다. 오늘의 시점에서 생각하면 그의 판단은 과연 옳았던 것 같다.
그러나「이든」은 「수에즈」운하의 분쟁에서 실족을 하고 말았다. 1956년10월 영국과 「프랑스」 가 「수에즈」운하의 확보를 위해 「이집트」 출장하자 영국야당은 『양식을 걸고』 총공격을 시도했다. 「이든」은 그만 사임서를 내고 말았다.
그의 부음을 들으며 한때 세계의 정치무대를 풍미했던 화려한 영국외교의 종막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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