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유보」는 끝나고 이제「현장」으로 기대와 보부는 해마다 엷어져 버린 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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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세 밑에 다가온 맹추위와 살을 에는 듯한 바람,대학4년, 그 안타까운 세월이 맵게 불어대는 이 세모의 바람속에서 후회가 휴지처럼 날아가고 있다.
이해가 가면 이제 옷깃에, 달린「배지」는 효력을 상실할 것이다. 정의와 진리를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표단했던 「배지」의 무용화.「배지」를 달고 있음으로해서 누렸던 현실의 유보상태는 이 해로써 끝이며 남겨진 것은 온 몸으로 부딪쳐야할 현실의 현장일 뿐이다.
나는 아직도 입학했을 때에 가졌던 기대와 포부와 미래에의 웅대한 설계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런 것들이 해가 지남에 따라 조금씩 바래지고 엷어져왔음을 기억한다.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또 3년이 덧없이 가버려 어느덧 대학생활을 마무리 지어야 할 76년을 보내면서 그런 기대와 포부와 미래에의 설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말하자면 나의 기대와 포부와 설계가 얼마나 환상에 가득차있었는가를 철두철미하게 깨달았던것이다.
우리가 높은 목소리로 외쳤던 진리, 교과서에 적혀있던 진리는 또한 얼마나 환상적이었던가.
그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가에 대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한 한 해였다.
몇몇 친구들은 입학 당시의 그 얄밉도록 오만했던 패기대신 조롱박같이 오그라든 어깨로 그들이 빈정댔던 유삭함찰에 취직을 했으며, 또 몇몇 친구들은 대학생활이 그들에게 길들여준 유보상태속에서 군대로 떠난다고들 했다. 결국 우리들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빈 껍데기뿐인 낭만이었으며 겉과 속이 다른 현실뿐이었다.
「워즈워든 의 시구보다는 3급 행정직시험을 위한 항공법과 재정법이 소중했고, 용기와 정열 보다는 노회한 애늙은이의 중용이란 미명 아래 저질러지는 타협이 바람직한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 기대와 포부와 미래에의 설계가 전혀 무가치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기도 했던 한해였다. 끊임없이 우리들 주위를 위험하는 현실의 비리속에서도 많은 친구들은 선명한 자기의 목소리를 가지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높은 목소리는 아닐지라도 값지고 절실한 자기의 목소리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배반이라는 단어를 아껴가면서 아직은 대학이 상아탑으로 존재해야된다는 당위를 위해, 현실과 「시지프스」의 신화같은 끝없는 싸움을 벌이는 용기와 정열. 그런 용기와 정열로 그들은 아무런 생계의 보장도 없는 그 안타까운 패리들 위해 가시밭 길인 학문을 택하기도 했던 것이다.
참으로 우리에게 소중했던 것은 대학4년이 마련해 준 회의와 실패와 좌절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만약 그런 것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온상에서 피어난 꽃처럼 얼마나 나약한 존재일 것인가. 바람만 불어도 금방 쓰러질 꽃의 허망함처럼.
이제 나의 사라진 나의 기대와 포부와 설계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기대와 포부와 설계가 움틀 것이다.
다시 또 그 기대와 포부와 설계가 환상처럼 쓰러진다해도 두려워 하지않을 것이다. 「엘리어트」의 시구처럼 우리에게는『천번 더 파괴하고 천번 더 창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을.
역사가 아무리 진리를 배반할지라도 열심히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믿음직한 친구들처럼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배반이라는 단어를 아껴가면서 행반이란 이름에 값할만큼의 성실한 삶만이 우리의 모든것 임을 온 몸으로 느껴갈 것이다.
다만 대학 4년을 성실하게 살아오지 못한 자신을 뉘우칠것뿐이다.
이제 겨울이 가면 봄이 찾아올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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