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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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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22면

고려대 안산병원

26일 현재 고려대 안산병원에 입원 중인 세월호 사고 피해자는 모두 84명. 침몰한 선박에서 구조된 안산 단원고 학생 74명을 비롯해 일반 탑승객 5명, 탑승객 가족 5명이다.

세월호 구조자 심리치료 담당한 고려대 안산병원 한창수 교수

이 병원은 전문의 7명, 전공의(인턴·레지던트) 11명, 간호사 20여 명, 심리치료사 5∼6명으로 특별치료팀을 꾸려 이들을 치료하고 있다. 이 팀의 상황실장 역할을 맡고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한창수(46) 교수를 25일 만나 생존자들이 겪고 있는 ‘외상후 상태’를 들어봤다. 사춘기인 두 자녀를 둔 한 교수는 “생존 학생 부모들의 현재 심정이 공감된다”고 말했다.

입원 치료 중인 학생들의 학교 복귀시점에 대해 그는 ‘서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섣부른 복귀는 정신적인 트라우마(외상)를 키울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와는 달리 치유 장소로 친구들이 있는 학교만큼 좋은 곳이 없으므로 빠른 복귀가 낫다는 의견도 있다.

한 교수는 “원칙적으론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었을 때 가능한 한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맞지만 이번 경우엔 사고 현장에 없었던 1·3학년이 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 입원 학생(2학년)들이 복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몇 % 정도가 병원 치료를 요하나.
“현재 학생들의 상태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이다. 병원이란 안정적인 환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 증상이 없더라도 수개월 후 불안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퇴원한 이후엔 현재 증상이 없더라도 학생과 보호자 전원에 대해 정신건강의학과 외래 진료를 계획하고 있다.”

-학생들의 현재 심리 상태는.
“병원 입원 직후의 혼란스러운 감정, 어리둥절한 느낌, 감정적 마비 등의 증상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작은 소리에 예민하거나 깜짝 놀라거나 두려워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국내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PTSD)가 부각됐던 사건은.
“내 기억으론 피해자들의 PTSD 등 정신과적 문제가 크게 다뤄진 사건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년)와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2003년)다. 삼풍 사고 발생 1년 후인 96년 11월에 당시 부상자 937명 중 681명이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 PTSD 여부를 고려대 안암병원에 의뢰했다. 나도 이 진단에 참여했으며 일부는 보상을 받은 것으로 안다. 일반적으로 대형사고 후 피해자의 10∼30%가 PTSD 진단을 받는다. 삼풍 피해자는 사고 1개월 후 40% 이상이 이 진단에 해당했다. 96년 당시 진단율은 20%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신과 군의관 시절 파견 근무를 했던 아프리카 서부 사하라에서 유엔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스트레스를 연구 보고한 적이 있다. 반 이상이 불면증·외로움·우울감 등을 호소했다.”

-PTSD에 걸리기 쉬운 유형은.
“과거에 큰 사고를 경험한 사람이 취약하다. 아시아나항공기 사고나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를 겪은 사람은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이번에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다. 의학 교과서엔 어릴 때 정신적 트라우마를 경험했거나, 가족·또래집단의 지지가 부족하거나, 수동적인 성격을 지녔거나, 알코올 중독이나 인격상 결함이 있는 사람에서 PTSD가 더 잦다고 쓰여 있다.”

-PTSD 증상과 치료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 뒤 10년이 넘도록 차를 타지 못하는 환자도 있었다. 어려서 성폭행을 당한 뒤 명문 대학을 졸업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반복적인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진 환자도 봤다. 현재 세월호 구조자들은 심리적인 재난(외상) 상태다. TV나 인터넷에서 세월호 관련 뉴스를 보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

-사고가 삶의 발전 계기가 될 수도 있나.
“이를 ‘외상후 성장’이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 사업가와 예술가로 성공한 사례가 있다.”

-외상후 성장을 이루려면.
“피해자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우울감·죄책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친구 등 주변 사람들이 재난 이후의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피해자에게 ‘나는 네 편’이란 확신을 심어 줘야 한다. 주변의 지지를 받으면서 스스로 혼란스럽고 괴로운 상태를 이겨 내면 심리적으로 과거보다 훨씬 단단해진다. 심리적으로 도(道)를 닦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이 외상후 성장으로 나가는 길이다.”

-‘외상후 울분장애’도 있다는데.
“사회적인 현상·재난 후에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울분·분노·우울·무기력감을 나타내는 상태를 말한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살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욕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직장 내 갈등이나 실직, 가까운 사람의 죽음, 본인의 이혼, 심각한 질병, 상실과 분리의 경험 등 일상생활의 부정적인 경험도 외상후 울분장애의 원인이 된다. 세월호 침몰처럼 턱없이 허술한 위기관리 시스템 탓에 발생한 황당하기까지 한 사고도 외상후 울분장애를 부른다. 이번 사고가 TV로 생중계되면서 일반 국민도 외상후 울분장애에 빠질 수 있다.”

-예방법은.
“과거에 당한 억울한 일이 자꾸 생각나고, 그 생각이 날 때마다 화가 나며, 그 사람이 똑같은 일을 당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면 외상후 울분장애나 우울증 여부를 병원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방하려면 평소 본인의 마음을 관찰하고 다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울분이 치미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울분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세상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 이는 자칫 사회나 자신을 향한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는 분노를 조절하는 연습이다. 음악영화 감상 등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자신의 삶의 목표를 재정립하면서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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