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례허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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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호화로운 집과 사치스런 산소가 새삼 말썽이다.
집을 너무 요란하게 지어 이웃 사람들의 빈축을 사는가 하면 장차 자기가. 묻힐 묘소를 마치 왕릉같이 거창하게 꾸미는 사례가 적지 않아 대통령이 그 제재를 지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국민의 반수 정도가 아직도 제집을 장만하지 못하고 남의 집 방한간을 얻어 셋방살이를 하고 있으며 개중에는 하룻저녁 끼니를 걱정하고 추위에 떠는 이웃들도 없지 않은 터에 수백평의 고대 유실도 오히려 좁다고 호사를 경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사회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집안에 「에스컬레이터」와 수영장을 두고 수억을 들여 치장하는가 하면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마련한다고 수만 평의 묘역을 가꾸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원래 집은 비바람·더위·추위를 막는 사람의 살림터요, 산소는 죽어서 묻힐 흙더미이련만 어찌 이것을 남의 입방아에 오를 만큼 특권적으로 꾸며 사회적 위화감을 조장하는 것인지, 그 뿌리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5척 남짓 조그만 몸뚱이로 태어나 40억의 인총 중에 살면서 유독 자신의 살림터만을 호화롭게 하고 죽어서도 기껏 다리 뻗고 누워 봤자 더 클리 없건만 분묘를 지나치게 꾸미려 고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제왕의 집인 궁궐과 능묘도 지나치게 꾸미는 것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왕권의 위신과 영화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일지언정 법도를 초월한 호사는 피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풍수설에 현혹되어 개장을 효도로 생각하고, 산소 꾸미는 것을 효도의 으뜸으로 삼아 남의 산소를 빼앗고 상여를 부수기까지 하며 송사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던 옛 풍습은 오늘에 있어서도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럴진대 살림을 몽땅 없애면서도 이미 한줌 뼈가 되고, 흙이 된 조상을 두고 운수의 좋고 나쁨을 가름하며 울고 웃고 했던 그때의 어리석은 유습이 어찌 오늘날 재현되고 있다는 말인가.
청룡 백호며 사격 진혈로서 후세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지할 수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풍수를 불러들여 터 잡고 막대한 재력을 기울여 분묘를 치장한다 해서 거기 묻힌 이의 저 세상 영혼을 편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오히려 탐욕과 이기심에 짓눌린 가엾은 영혼은 그 집착으로 해서 고통 속에 헤맬 것이며 저승에서의 평안을 이룰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더우기 그럴만한 재력을 가지고서도 도리어 가난한 동포, 이웃들을 외면할 뿐 아니라 안하무인의 이기 추구만 일삼는다면 이는 이들로 하여금 상대적인 빈곤감과 불행·열등·좌절에 더욱 침잠케 하는 도덕적 가학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이는 비단 지각없는 개인의 무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요, 한 시대 한 사회 속에 사는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일탈이며 범죄로 규정되어 마땅한 것이다.
위난에 당면해서 국민 모두가 함께 겪는 고통이니 참고 견디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지는 못할지언정 남들의 고통을 자기의 영화로 대신하며 활개치는 비도덕적 인간의 전형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이런 부도덕의 유행은 그 자체보다도 그 배경이 되고 있는 사회 기강 전체의 문제로 파악되어야 한다.
우리는 박 대통령이 『부정부패·부조리의 추방과 사회 기강 확립이 천혜의 자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근본』이라고 지적한 정견에 호응하면서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 의식이 좀더 건실화 하기를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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