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이보영(문학평론·전북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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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 전까지 소설습작은 해보았지만 문학평론을 써 본 적은 없었다. 한국의 근대소설에 대하여는 체계적 지식도 없었으며 외국문학도들이 대개 가지고 있는 정도의 독서량과 지식뿐이었다. 게다가 문학평론가가 되어보겠다고 벼른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68년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 평론부 응모작을 썼을 때의 나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가지 조건이 나를 강력하게 밀지 않았더라면 응모작을 그처럼 열심히 생각하고 쓰진 못했을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일신상의 몇 가지 문제로 몹시 터덕거리고 있었다. 그 곤경에서 숨통을 터줄 수 있는 것을 바라고 있었는데, 마침 그 기회를 준 것이 신춘 중앙문예였다. 바꿔 말하면 그 응모작을 쓰도록 추진해준 것은 문학 속에 숨은 영혼구제의 힘이었다. 무슨 사회개혁이나 인류사회를 위한 예언의 목적이 아니라 조그만 한 사람의 고민을 달래고 해소해 줄 수도 있는 문학의 힘이었다.
나는 그 힘을 김동리 문학에서 구했다. 전부터 동리의 문학계승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리의 작품을 철저히 연구해 온 것은 아니었다. 신춘문예 모집광고를 보고 연구대상을 막연히 이것저것 생각해보다가 갑자기 눈앞에 바짝 다가온 것이 동리였다. 그의 작품을 면밀히 검토하면 뭔가 깊은 핵심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뉴·크리티시즘」의 방법을 원용하여 동리의 작품에 잘 나오는 「이미지」와 상징의 의미를 더듬어가면서 그 핵심을 찾아내려고 했고 그리하여 『연화』의 오의에 접근해갔다. 주로 참고한 책은 그 무렵 친해진 「J·E르낭」(예수전)과 「카를·G·융」의 종교 연구서였다.
지금도 그 때처럼 내가 믿고있는 것은 문학평론이 학문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는 점이다. 학문적 지식은 그 「에세이스트」의 암중 모색의 길잡이다. 그가 찾아보아야 할 것은 학문의 울창한 숲이 아니라 그 숲 속의 알려지지 않은 길이다.
그에게는 학문하는 사람의 초연한 태도도 필요하지만, 평소 존중하는 작품에 대한 비판적 공감의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 또한 「에세이스트」로서의 「스타일」도 중요시된다. 학자의 「스타일」은 흔히 제것이 아니면서 고정되어 있지만 「에세이스트」의 「스타일」은 유동적이다. 학자는 글의 「스타일」때문에 걸음이 막히는 일은 없지만 「에세이스트」는 그 때문에 방황하기도 한다. 「에세이스트」의 비평은 발견의 모험인데, 그것은 작가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령 「골고다」언덕 예수의 양편에서 죽은 두 도둑의 얼굴은 어떤 화가도 취급하지 않아서 미지의 암흑 속에 싸여져왔는데, 동리가 그 중의 한 도둑을 <사반>이라고 명명하고 소설측에서 예수와 대결시킨 것이 그 본보기다. 좌우간 약 한달 반 동안 『연화의 비의』라는 제목으로 쓴 김동리론은 정명환 심사위원이 당선작으로 추천해주었고 그 일을 계기로 하여 나의 학문생활 뿐 아니라 내면생활의 방향은 새로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시일이 갈수록 문학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늘고 쌓여서 그 응모작을 쓸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터덕거리게 되었으니 이것도 중앙일보 신춘문예의 덕택이다.

<약력>
▲34년 전주 출생 ▲전북대 영문학과 졸업 ▲68년 신춘「중앙문예」에 문학평론 『연화의 비의』(김동리론)로 당선. ▲『질서에의 의욕』(이상론). 『「월터·페이터」의 비평』, 『황순원의 세계』 등 평론 다수. ▲현재 전북대 문리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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