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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20만명의 연탄중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정감록에 나오는 10승지는 풍광명미한 고장일 뿐 아니라 영묘한 피난지로 구분돼 왔다. 병화와 화적떼의 노략질에 시달린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을 보전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소망 때문에 이런 도참설에 매료됐던 것이라 하겠으나, 실제로는 이에 못지 않게 그 당시 돌고 있던 무서운 돌림병의 위협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지와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 창궐한 전염병은 한꺼번에 온 마을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기가 일쑤였으며, 이 같은 전염병을 피해 집단이주 현상이 수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한 예로 옛날 평안도지방 사람들이 10승지의 첫째로 꼽힌 경북 풍기의 금계동을 찾아 집단부락을 이룩한 것이 이 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보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치안이 확보되고 의술이 발달된 오늘날, 화적떼에 의한 살상은 말할 것도 없고, 돌림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별로 문제되지 않을 만큼 줄어들었으나, 엉뚱하게도 연탄「개스」 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가까이는 지난 1일 하루 동안 수도 서울에서 만도 자그마치 72명이 중독, 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 않는가.
1년을 통해서는 놀랍게도 약2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겨울철의 사신」이라는 연탄「개스」에 중독돼 65년에는 4백32명이 숨졌으나 10년 만인 지난 75년엔 무려 6백80명으로 늘어났다는 공식통계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중독 되면 설사 낫더라도 심한 만성후유증으로 고생하게 된다고 하니, 뇌신경장애·기억력감퇴·보행장애·이상정신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숫자는 과연 몇 십만 명이 될지 어림할 길조차 없다.
이처럼 치명율은 법적 전염병보다 훨씬 높고, 후유증 역시 그 어느 질병보다 심각한데도 어찌된 까닭인지 「연탄」중독이라는 돌림병에 대한 경각심은 소홀하기 짝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에 살인강도들에게 1년에 20만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공격을 받고 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상되는 살인강도사건이 연발한다면 사회질서의 기저를 뒤흔드는 상태라고 세상이 떠들썩할 것이 아니겠는가. 또 뇌염이나 「콜레라」가 발생하여 해마다 20만명의 이 환자가 생긴다면 또 어쩔 것인가.
전염병발생은 곧 문명국가의 수치로 받아들여 방역 비상령을 내리면서 유독 우리 나라에만 있고 또 훨씬 무서운 이 연탄「개스」사고에 대해선 부끄러움도, 별다른 경각심도 갖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국민모두가 유류「보일러」를 놓을 수도, 그렇다고 다시 산림연료로 바꿀 수도 없으며, 또 연탄「개스」사고 없는 10승지도 없는 현실이고 보면 연탄「개스」중독방지를 위한 범국민적 「레벨」에서의 특별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제독연구활동이 강력히 추진되어야 한다. 원자력발전소까지 건설한 국력과 과학기술을 가진 우리 나라에서 연탄「개스」문제 하나 해결치 못하고 영구 미제의 숙제로 남겨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 때 서울시에선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그 방안을 공모한 적이 있었으나 어느새 흐지부지돼, 지금은 연구하려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모름지기 정부예산을 책정하여 권위 있는 연구기관에 「프로젝트」로 줘서 연구 개발토록 하여야한다.
다음은 연탄「개스」사고는 연소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가정용 탄만은 절대로 저질탄을 쓰지 못하도록 제조·판매·수송과정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감독하고 열량검사·품질검사를 수시로 해야한다.
이와 함께 가정마다 연탄「개스」주의를 생활화해야 한다. 가옥구조에서부터 문지방이나 벽·방바닥의 틈새, 탄의 건습도, 불지피는 시간 ,기상상황, 취침 때의 배기유의, 중독자발생시의 응급대책 등에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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