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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인 것이 미안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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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어른인 것이 미안하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합니다.”

 “어른들 말만 믿고 선실에 있다 아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못난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일조한 기성세대라 너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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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개설한 ‘기원 메시지’ 코너에 올라온 글들이다. 수학여행에 나섰다가 구조되지 못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애도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특히 성인들은 ‘미안하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 사고, 지난 2월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 때도 국민은 희생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이번 사고에선 특히 “어른이라 미안하다”며 기성세대의 잘못을 반성하는 이가 많다.

 상당수는 사고 여객선의 안전점검이 미흡했고 학생들에게 안전교육도 시키지 않는 등 사고의 원인이 어른의 잘못이라고 자책했다. 회사원 황모(46·서울 서초구)씨는 “아이들을 침몰하는 배에 놔두고 선장 등 어른들이 먼저 나와버렸는데, 사고 원인에도 돈을 더 벌거나 귀찮은 일을 안 하려는 어른들의 욕심이 투영됐을 것”이라며 “죄 없는 아이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은 데 대해 어른으로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한 네티즌은 “그동안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놀라긴 했지만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이번 사고를 보다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며 “나도 기성세대가 됐는데, 못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 책임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회사원 정태규(43·경기도 화성시)씨는 “부모나 어른,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만 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씁쓸해했다.

여객선이 2시간 넘게 바다에 떠 있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구조를 못한 데 대해 극심한 무력감을 느낀 것도 미안함의 요인이 됐다. 전혜진(38·서울 성동구)씨는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에 갇혀 있는 게 뻔히 상상이 되는데 배가 가라앉는 동안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나 경주 마우나리조트 사고 등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이번 여객선 사고는 TV를 통해 전 국민에게 침몰하는 과정이 생중계됐다”며 “뻔히 보는 가운데 아이들이 구조되지 못하니 무력감이 극대화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 대응이 우왕좌왕했다는 게 드러나면서 기성세대가 느끼는 상실감이 미안한 감정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부모와 자식 간 관계가 서양에 비해 두터운 한국 문화도 영향을 미쳤다. 김희진(45·서울 서초구)씨는 “수학여행은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보내지 않느냐”며 “내 자식이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고 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번 사고는 전 국민이 목격자가 된 셈인데 국가나 사회, 개인이 침몰하는 배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는 무기력증을 안겼다”며 “대한민국 역사상 6·25전쟁 이후 가장 큰 심리적 상처를 남긴 사고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대형 사고 때는 생존자가 나와 희망을 찾는 계기가 있었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며 “나라 전체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고 얼마나 빨리 회복되느냐는 나라의 역량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차성현 전남대 교육학과 교수는 “웃어른을 공경하는 유교문화에 바탕을 둔 우리 사회의 기둥 하나가 흔들렸다”며 “갈등 해소가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신뢰를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일부 네티즌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안전하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취지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김성탁·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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