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송·원대 도자 명품이 한자리에|햇빛 본 신안 앞 바다 「해저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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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남 신안 앞 바닷속의 도자기는 건질수록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어 고미술 연구가들의 흥미를 모으고있다.
이제까지 인양된 것만도 2백 44점.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지난 1일 발굴해낸 1백 15점과 지난 9월 도굴범들이 건져낸 것이 1백 29점(압류보관 중)이며 그밖에 오래 전부터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나왔다가 『재수가 없다』고 다시 바닷속에 버려진 것과 지난 1월 한 어부가 신고해 1백만 원의 보상금까지 받은 청자 화병 등을 합한다면 모두 3백 점은 실히 될 것 같다.

<인양된 것 모두 2백여 점>
중국 제1의 청자 산지인 용천요 청자가 중심을 이룬 이들 문화재 중에는 외국에서 수천만 원으로 평가됨직한 것도 여러 점 포함돼 있어서 값으로 평가해도 수억 원은 되지 않겠느냐는 공론이다. 물론 문화재 가치란 개개인의 취향·기호·경제적 사정 등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바닷속에 수백 년 간 묻혔다가 나온 일괄 품이란 점에서 학문적 가치가 더 붙게 된다. 말하자면 굴 껍질이 붙은 값이랄까.
3일 하오에 열린 이들 인양 문화재의 평가심의회(조명기, 최순우, 김원용, 임창순, 예용해 문화재위원)에서도 도굴범들이 인양한 청자 향로(3점)와 청자화병은 중국청자의 전성기인 11세기 후반∼12세기초에 만들어진 세계적 수작으로 지목했다. 이밖에 이번 조사단이 인양한 백토분장 흑회용문 항아리, 백자음각 운용문 항아리, 청자환이병 등도 일품으로 평가됐다.
심의회는 또 이들 보물이 당시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 침몰했던 것으로 모두 일치된 추측들을 했다. 송·원대의 대일 무역선은 대체로 벼 2천 섬을 실을 수 있는 대 범선이었다는 것. 따라서 이 같은 큰 무역선이 침몰했을 경우 현재까지 인양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아직도 바닷속엔 많은 양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천요·수무요 산이 주류>
문공부는 이 같은 추정아래 신안 앞 바닷속의 「보물섬」을 들어올리기 위한 제2차 발굴인양작업을 11월 중순부터 다시 펴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 중국 도자기가 송·원 어느 시기 것이냐는 데는 뚜렷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평가심의회는 『인양유물의 상한연대는 북경(10세기)까지 올라가지만 하한은 남아있는 유물을 더 인양해 종합검토하자』고 미루었다. 그것은 북송 계통의 가마에서 만든 도자기들이 새로 적잖게 발견되는 까닭이다. 침몰된 배가 당시 무역선일 경우 그 배의 물건은 극히 제한된 10∼20년 사이로 압축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 없어 편년에 혼선>
하남성 황하유역을 중심한 북송의 청자는 우리 나라 고려청자에도 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단아 숭고한 자태가 특징. 그러나 수무요의 경우엔 이질적으로 자유분방한 모습이다. 절강성 용천요와 경덕진요 등의 도자기는 신선함보다는 우아함에 치중돼 있다.
도자기들의 산지는 대체로 판명이 됐지만 이들 도자기를 굽던 요가 수백 년 간 중국 도자기의 명산지로서 계속돼왔기 때문에 편년의 확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인양된 도자기에 음화자기가 없다는 점은 원대 후기로 나오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있다. 남송 중기에 속하는 13세기초에 원이 이미 건국하므로 이 전후한 시기로 얘기는 맴도는 것 같다.
역사상 드물게 값진 2백여 점의 해저유물을 수확하고서도 학계나 당국이 편년과 시대구분에 머뭇거리는 것은 비교 검토할 실물자료가 국내에 빈약한데다 전문가마저 길러내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외국문화재에 눈 돌릴 수 없었던 한국학계가 뜻밖의 수확에 시달림을 받는 실정이다. <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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