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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의 청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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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국 제일의 청자 산지로는 용천을 꼽는다. 대륙 동남단의 절강성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 이웃에는 한때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이름 높던 항주가 있다. 용천이 요지로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필경 무역항과 이웃한 입지조건 때문일 것이다.
항주의 무역항로는 인도지나·「말레이지아」·「필리핀」·동인도제도·중앙「아시아」·인도·「이란」·「이라크」·「이집트」·「유럽」 등으로 이어진다. 물론 일본으로 진출할 때도 있었다.
용천의 청자는 대체로 이 무역항로를 따라 세계로 흩어졌다. 또 중국의 수출품목 중에서 이들 자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용천을 중심으로 수많은 도요군이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청자는 북송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지리적인 조건과도 관계가 깊다. 북송(960∼1126년)은 육로로 우리 나라와 연결이 잦았다.
남송시대(1l27∼1279년)의 대표적인 청자를 구워 내던 용천요는 지리적으로 남쪽에 처져 있어 우리 나라와는 그만큼 접촉이 잦지 않았을 것 같다. 항주의 무역선이 일본으로 뻗을 때 우리의 흑산도를 스쳐 가는 정도였을 것이다. 일본의 도자에서 남송의 빛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런 자기무역이 얼마나 빈번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중국의 도자 문화는 당·송 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항주·상해·영파·온주 등은 세계의 고미술상들이 언제나 성시를 이루었었다. 그것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도자문화의 「스케일」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요즘 우리 나라의 신안군 지도 앞 해저에서 인양된 중국유물들은 말·원대 자기로 추정되고 있다. 그것은 이들 유물 속에 껴묻어 나온 동전들에 새겨진 연대에서 근거를 두고 추정한 것이다. 「경원」이라고 새겨진 연호는 AD 1195연대. 또, 한 글자가 무디어지고 「화」자만 남은 연호는 북송조「순화」(AD 990∼994년)라는 것이다.
이처럼 원나라와 송나라 것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유물의 연대는 남송 말∼원초일 것 같다. 남송은 원에 의해 망했기 때문이다.
이들 보물을 만재했던 배가 어느 시대의 것이었을 지는 궁금하다. 배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혹시 그 시대의 무역선이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일설에는 훨씬 후세로 내려와 청대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니 말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들 유물의 인양으로 남송대 도자의 편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이런 보물들이 오늘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신기하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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