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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앞으로 어른 말 믿겠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배를 떠나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에 따라 선실에 머문 학생 다수가 희생된 것으로 드러나자 학부모들이 자녀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인터넷 카페에선 ‘자녀에게 비상상황 시 나오는 안내 방송을 따르라고 해야 할지 고민된다’는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사고 당시 생존자들이 촬영한 선실 내부 영상엔 바닷물이 들어차는 와중에도 학생들이 안내 방송에 따라 선실을 벗어나지 않고 침착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인터넷에선 이를 두고 ‘대기 지시가 없었다면 저렇게 평온하게 있었겠냐’며 안타까워하는 의견이 많다. 중앙대 신광영(사회학) 교수는 “성인 승객이 다수였다면 달랐을 것”이라며 “윗사람 말을 잘 따르고 또래 관계를 중시하는 학생들이라 더 피해가 컸다”고 분석했다.

 중학생 자녀를 둔 정모(42·여)씨는 “대기하란 지시를 따르지 않고 나온 학생은 살아남고, 착실히 따른 학생은 실종된 경우가 많아 혼란스럽다”며 “학부모끼리 만나면 모르는 어른은 말할 것도 없고, 교사라고 믿고 맡길 수 없겠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초등생 자녀를 둔 윤지나(32·여)씨는 “사고 시 제대로 된 지시도 하지 않고 달아나는 어른들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아이에게 사고가 터지면 어른 말만 듣지 말고 살 방법을 찾아 도망치라고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교사들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초등교사 이모(32)씨는 “나 역시 사고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배를 버리고 떠나라’고 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며 “어디까지 현장 교사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양대 정진곤(교육학) 교수는 “가장 신뢰받아야 할 어른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데 대한 실망과 분노가 큰 상황”이라며 “리더부터 책임감과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칫 이번 사고로 ‘비상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해 움직여야 한다’는 섣부른 인식이 번져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광운대 이원호(건축공학) 교수는 “선진국에서도 비상 상황에서 일단은 리더의 지시를 따르는 게 기본”이라며 “다만 리더가 이번 사고에서처럼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기본을 지키는 매뉴얼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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