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세계적 불안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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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리는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 사회도, 어느 누구도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한 불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진단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이든 국가든 간에 불안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과 같은 내부적 요인에서 비롯될 수 있다.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외부의 압력에 부딪칠 때 불안은 급속도로 커질 수밖에 없다. 일단 점화된 불안감은 빠른 속도로 전염되며 기하급수적으로 그 도를 높여 가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이라크 전쟁과 북한 핵 문제 등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세계적 불안도 결국 국가의 운명과 위상에 대한 각자의 불안감과 직결된 것이다.

*** 냉전 종결후의 국가생존 전략

냉전을 승리로 끝내고 국제질서의 중심이 된 미국이 9.11사태로 극도의 불안에 휩싸인 것이 세계적 불안의 최대 원인이 됐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유일 초강대국이면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테러 공격을 속수무책으로 당한 미국은 심한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 군사력을 갖고도 국가안보를 보장하기 어려운 새로운 현실이 미국을 불안하고 당황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직면한 이러한 위협과 그에 따른 위기감을 세계가 함께 느끼기보다 혼자서 외로이 경험하고 있다는 고립감이 미국의 불안과 일방주의적 정책의 원인이 된 셈이다.

프랑스의 외교전문가 도미니크 모이지의 지적대로 9.11 이후 미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한 데 반해 유럽을 비롯한 나머지 세계는 평시 상황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둘 사이에는 현저한 인식의 틈이 벌어져 버렸다.

9.11은 미국의 관점에서는 세계를 바꿔놓은 사건인 데 비해 나머지 세계의 눈으로 볼 때에는 미국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는 스티븐 피들러의 말도 맥을 같이하는 분석이다. 이러한 미국의 고립감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의 와중에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과는 달리 유럽과 일본의 불안은 세계사의 중심무대로부터 밀려날 듯한, 즉 앞줄을 내주고 뒷줄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정치.경제.군사, 특히 기술 면에서 미국과의 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이라크전의 결과는 이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불안감이 프랑스와 독일 등 일부 유럽국가 지도자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한편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라는 통계상의 위치에 걸맞은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꿈의 실현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있는 데 대한 초조감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이른바 선진국들의 경우와는 달리 북한의 불안은 체제의 성격이 자초한 시대적 조류로부터의 고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냉전의 종결과 정보화시대의 개막은 시장의 세계화란 물결 속에서 개방과 교류를 국가생존전략의 핵심으로 보편화시켰다.

그러나 체제의 성격상 개방의 길을 쉽게 택할 수 없는 북한으로서는 고립에서 오는 경제적 후퇴와 생존의 기로에 부닥친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아시아의 세 공산주의국가 가운데 중국과 베트남이 과감하게 시장경제를 통한 발전의 대열에 참여한 것은 북한의 고립감을 한층 심화시켰을 것이다.

그러한 고립감이나 절망감은 체제생존 자체에 대한 위기감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과 북한 간의 날로 고조되는 긴장도 그 저변에는 서로가 지닌 색다른 불안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유·통일 어느쪽이 우선인가

한국도 역시 불안의 예외지대는 아니다. 우리의 불안은 원초적으로 지정학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과연 우리에게 합의된 국민적 의지가 있느냐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이 직접적 원인이랄 수 있다.

자유와 통일 가운데 어느 쪽이 우선인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어떠한 대가도 치를 각오가 있는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로서의 실력을 기르고 위상을 굳히는 데 국가발전의 목표를 둘 것인가, 아니면 제3세계의 기수 역할을 자임할 것인가?

이와 같은 일련의 선택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이 오히려 국민적 분열의 증후가 짙어진다면 불안의 시대를 헤쳐가야 하는 우리의 앞날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前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