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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흰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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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옛 거북점에서는 계절에는 모두 색채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겨울은 흑색, 봄은 청색, 여름은 적색, 가을은 백색. 그래서인지 우리는 겨울을 현동이라 하고 봄은 협춘, 여름은 주하, 가을은 백추라고 곧잘 표현한다.
색채는 계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방위에도 있는 것으로 옛사람들은 보았다.
서의 백호, 동의 청룡, 북의 현무, 남은 주성. 곧 서는 백색, 동은 청색, 북은 흑샌, 남은 적색이었다.
따지고 보면 계절이나, 방향의 색채는 모두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 틀림이 없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그것은 마치 동쪽에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여름은 하루로 친다면 가장 날씨가 뜨겁고, 햇빛을 제일 많이 받을 수 있는 대낮과 같다. 이때에는 해도 제일 붉게 타오른다. 이래서 여름과 남쪽을 붉은 색으로 나타낸 것이다.
겨울은 해가 없는 북쪽과 같다. 북풍은 또 겨울에 분다. 그리고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는다. 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을은 해가 지는 서쪽과도 같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인생의 황혼과도 같은 애상을 안겨주는 철이다. 모든 것이 퇴색하고, 있는 것은 흰 서리, 흰 입김의 백색뿐이다.
오늘아침 서울의 수은주는 갑자기 섭씨 5도로 떨어졌다. 가을도 끝나 가는 신호인 것 같다.
『우울한 나날, 1년 중에 가장 슬픈 계절이 왔다. 애호하는 바람, 별거벗은 숲, 메마른 목양…』 이렇게 「보라이언트」가 노래한 만추에 이른 것이다.
가을의 흰 색채는 한색이다. 또한 서글픔과 외로움을 안겨 주는 색채다. 같은 흰 색이라도 겨울의 눈은 오히려 포근한 느낌을 준다. 늦가을의 서리는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안겨줄 뿐이다.
이제 기다려지는 것은 검은 색으로 뒤덮일 겨울밖에는 없다. 그리고 화려한 색채들로 가득찼던 여름이며 이른 가을에 대한 회상 속에 잠기는 수 밖에는 없다.
오늘 사람들은 모두 어깨를 움츠리고 총총걸음으로 포도위를 걷고 있다.
저무는 시간에 쫓겨서일까, 추위에 쫓거서있까, 아니면 지난 계절들이 마련한 추억들이 짐스러워서일까.
그러나 흰색은 단순한 색채는 아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황량하기도 하고 화사하기도 하다. 아무리 한색이라 해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포근해질 수도 있는 색채다.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다. 늦가을의 추위도 마찬가지다. 겨울의 검정색 보다는 한결 밝고 따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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