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경제 가치가 모든 걸 압도한 시대 … 하지만 대학은 달라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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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호 23면

조인원 총장은 ‘큰 학문(大學)의 장(場)’인 대학을 기술과 이를 위한 전문지식이 대체할 수 있다는 시각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조용철 기자

경희대학교가 다음 달 18일 개교 65주년을 맞이한다. 경희대의 교훈은 ‘학원·사상·생활의 민주화’, 교시는 ‘문화세계의 창조’다. 경희대는 1970년대 이후 평화운동과 세계시민운동을 통해 ‘학문을 통한 평화’를 추구했다. 경희대 제14대 총장 조인원 박사(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 또한 세계시민포럼(WCF) 의장 등의 역할을 맡아 ‘학문과 실천의 공동체’인 대학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조 총장은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두 주제와 씨름해왔다. 그의 소신은 “공교육은 대학이 변할 때 정상화된다. 학문적 깊이는 반드시 경쟁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은 경쟁보다는 수신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대학의 미래상에 대한 조 총장의 의견을 듣기 위해 그를 인터뷰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대학 교육의 현주소는?
 “전반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많은 대학이 대학과 미래가 어떻게 조우할지 고민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간 소외가 회자된 지 오래다. 대학이 변해 기술과 인간의 조화로운 결합을 지향하고, 경쟁과 효율의 현대적 세파에 내몰린 인간적 가치와 감성을 복원해야 한다. 대학이 인간에 대한 화두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대학이 왜 필요하냐’는 의문이 대두할 수 있다.”

개교 65주년 경희대 조인원 총장

 -한국에 국한된 특수한 문제는?
 “철학 부재의 문제다. 사회적으로 한 번도 ‘대학이 무엇인가’라는 깊이 있는 담론을 펼친 적이 없다. 뜻있는 교수와 지성이 함께 이 주제를 토론하곤 하지만 아직 일반적 관심사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시대 상황은 대학에 ‘성장과 발전’의 지적 기반을 요청했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넘어서야 한다. 개인의 성취와 타자의 행복을 함께 고민하고, 인간과 사회, 지구의 미래를 포괄적으로 성찰하는 대학상(大學像)이 필요하다. 대학 철학을 정립해야 하는 시대적 과업을 시작할 때다.”

우리 교육 최대 문제는 ‘철학의 부재’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것은?
 “대학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근본 가치’다. 학술공동체로서 대학은 진리와 학문을 추구한다. 학생들에게 자유 의식, 비판 의식, 대안 모색 능력을 키워준다. 또 학생들이 인간과 삶의 의미를 철학적·성찰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런 전통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학이 제공하는 문화와 제도가 적절하고 충분한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미래가 요청하는 비전과 가치를 오늘로 불러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도 큰 의미에선 사회기관이다. 정부나 기업 등 다른 사회기관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많은 분들이 대학이 과도하게 정부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대학이 진리 탐구의 장으로 기능하고,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는 데 필수적인 자유와 자율이 손상되는 게 아닌지 우려한다.”

 -학생들은 성찰할 여유가 없다.
 “수십 년 전에도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이 왜 존재하나’ ‘대학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묻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학문하는 까닭은 여럿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다. ‘자신’은 사람이다. 사람은 공동체의 일부다. 과거에는 민족 공동체, 국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게 중요했다. 세계화와 상호 연결의 심화로 지금은 ‘지구시민’이라는 소속감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구할 가치를 발견하는 가운데 사회와 인류에 대한 자신의 책무가 무엇인지 깊이 사유해야 한다. 젊은 학생들은 대학에서 자신의 꿈과 포부를 키워야 한다. 하지만 목표가 대학 입학에서 취업으로 바뀌는 게 현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생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얼마만큼 깊이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할 가능성을 봐야 한다. 당장 취업에 필요한 지식만으로 졸업생을 평가하면 대학은 취업 준비의 장으로 전락한다.”

 -총장실로 전달되는 목소리는?
 “대학도 사회의 일부다.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이 있다. 윤리적인 문제, 제도나 규정, 시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수강 신청 문제와 같은 기술적 문제를 가끔 듣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대학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선 총장실로 접수되는 게 거의 없다. ‘대학에서 이런 것을 기대했는데 없다’라든가 ‘이런 배움의 터전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많지 않다. 기술적 문제에 대한 일차적 관심은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보인다. 대학이 다른 사회기관과 똑같이 돼 버렸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은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변화하고 진화해 나간다는 측면에선 대학도 여느 기관과 같다. 기업의 근본 목표가 이윤 창출, 고객만족이라면 대학도 독자적 영역이 있다. 학문 탐구를 통해 더 나은 자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역사·문명에 기여하는 게 대학의 핵심 가치다. 이를 포기하는 순간 대학을 더 이상 대학이라 부를 수 없다. 시대 변화 속에서 사회의 요청을 수렴해야 하는 것도 대학의 역할·기능 중 하나다. 국내외 모든 대학은 내부적으로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 후기 산업화 시대에도 대학은 기업과 경제 활동에 도움이 되는 지식기반 제공을 요청받는다. 경제 문제가 사실상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성취는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 편중의 학술과 교육은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사회의 다양성, 대학의 근본 가치가 흔들린다. 적절한 조화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획일화된 요구에 따라 모든 대학의 교육체계가 동일하게 되면 ‘호모 에코노미쿠스’ 외의 인간을 말할 수 없게 된다. 시장 논리가 대학이 반드시 따라야 할 길이라고는 볼 수 없다. 감당하기 힘든 반작용도 분명히 있다. 경제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되면 ‘시장만 있으면 되는데 국가·종교·문화·예술은 왜 필요한가’ ‘소비자만 있으면 되는데 시민은 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싹틀 것이다. 사회가 결코 그렇게 돼선 안 된다. 자유시장주의가 ‘역사의 종언’일 수는 없다. 시장의 역기능을 풀어가기 위해 새로운 가치나 영혼의 미덕을 만들어내야 한다. 최근엔 기업들도 윤리 경영, 책임 경영을 과업으로 삼고 인류 보편 의제에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 않은가.”

대학 평가, 눈앞의 숫자 경쟁 벗어나야
-기업친화적인 교육은 어떨까.
 “물론 학생들의 관점에선 취업이 중요하다. 하지만 사회 진출이라는 관점에서 대학교육을 봐야 한다. 우리 학생들은 시인·소설가·예술가·사회운동가·탐험가·학자·정치인 등 다양한 진로를 준비한다. 학생들의 다양한 가치와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곳이 대학이다. 대학이 기업만큼 기업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잘 가르칠 수는 없다. 기업은 연수원에서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정부도 언론기관도 자체 훈련을 한다. 특정 목적으로 설립된 직업 대학원이나 대학은 업무와 밀접한 교육을 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대학이 기업과 협력관계를 맺고, 그 기업에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구획화’된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대학에서 모든 학생에게 취업에 필요한 커리큘럼만을 부과한다면 대학은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전락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우려하고 있다. 평균 수명의 증가로 오늘의 젊은이들은 앞으로 생애주기별로 여러 차례 재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대학에서의 수학 기간은 짧다. 대학에서 습득할 지식 양도 한정돼 있다. 게다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은 시시각각 바뀐다. 대학에서는 사유하는 방식, 비판적·창의적 사고, 대안 제시 능력, 인류의 고전을 비롯해 지식을 폭넓게 습득할 수 있는 역량, 미래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가르쳐야 한다. 세계적인 대학들이 높은 명성을 쌓아가는 이유도 현실을 헤쳐가고 미래를 개척할 폭넓은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대학들의 경우는?
 “예를 들어 미주와 유럽의 많은 명문 대학의 경우 기업에서 당장 활용할 과목을 제공하지 않는다. 학부에서 교양(liberal arts)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양교육은 인간과 세계를 탐색하고, 가치와 윤리, 우주와 자연의 근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학문 위주로 구성된다. 우리에 비하면 학생 본인이 ‘사학과를 졸업했다’ ‘경제학과를 졸업했다’는 식의 의식이 그리 깊지 않다. 폭넓은 교양학문, 기초학문을 토대로 전공과목들을 택하고 졸업한다. 한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전공과목을 이수하고 졸업한다. 그렇다고 그들 대학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와서 적응을 못한다’ ‘기업에 나가서 적응을 못한다’고 보기 어렵지 않은가.”

 -대학 평가는 대학에 어떤 의미인가.
 “우리 대학 대학주보에서 내부 설문조사를 했다. 교수와 학생은 과반이 조금 넘게 ‘외부 평가를 잘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평가 자체가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대학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평가는 ‘미래에 어떤 대학을 만들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가치에 연결돼야 한다. 그런 생각을 놓아버리면 모든 대학이 똑같아진다. 정체성 없는 대학이 만들어진다. 그런 ‘상실의 위기’를 어느 대학도 원치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대학행정을 담당하는 분들이 모이는 회의가 있었다. 대학 평가가 지나치게 경영·관리·성과 위주의 계량 지표, 통계, 고객 만족도와 같은 것을 중시해 ‘큰 의미를 두지는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평가기관의 과제는 대학사회의 더 많은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는 일이라고 본다. 학술기관이 무엇인지, 교육기관이 무엇인지, 대학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철학을 깊이 살피는 것이 절실하다. 대학 평가에서 주요한 기준 중 하나는 평판(reputation)이다. 개인과 사회, 문명과 지구의 미래를 물으며 학문의 깊이,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대학들이 앞으로 좋은 평판을 얻게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성숙한 개인, 존경받는 사회, 신뢰할 수 있는 정부, 인권·생태·평화·환경·복지와 같은 지구적 의제 해결을 위한 인류사회. 우리 모두의 꿈 아닌가.”

 -대학 내부의 평가도 중요할 텐데.
 “몇 해 전 하버드대가 제공한 기사를 봤다. 그 대학에서 ‘대학석좌교수(University Professor)’를 임명했다는 기사였다. 해당 교수의 뛰어난 학문적 성취, 융합 연구, 인류사회 공헌 등을 참작해 대학의 최고 영예를 부여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제도는 객관적으로 정량화·수량화돼 있는 평가 기준보다는 선정위원회의 치열한 논의와 숙고를 토대로 대학의 최고 영예를 가름한다. 우리 사회에선 아직 정성평가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학도 그렇고 평가기관, 사회도 그런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앞으로 변해야 한다. 대학의 중추를 이루는 학술과 교육, 행정 분야에서 의미와 가치, 공헌을 평가하는 방식이 적극 도입돼야 한다. 개인과 사회, 인류의 미래에 대한 기여도가 ‘탁월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 그래야 더 나은 대학의 미래, 학문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대학 미래가 곧 사회인류의 미래
-규제를 푸는 것은 대학에도 좋은가.
 “그렇다. 학부와 대학원 정원, 학교법인 이사 승인 등 대학에 대한 규제는 포괄적이다. 대학 규제를 푸는 문제도 ‘대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성찰이 바탕이 돼야 한다. 일례로 사립대학이 발전하려면 재원 마련을 위한 자구 노력이 강화돼야 한다. 자구 노력은 결국 대학 발전을 위한 수익 창출, 이윤 창출을 의미한다. 비영리기관인 대학이 이와 같은 활동을 적극 도모해야 할지에 대해선 깊이 있는 성찰과 논의가 필요하다. 사회적 공감과 합의도 반드시 필요하다. 사립대학과 국립대학 발전을 위한 정부 지원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나 하는 문제도 중요한 쟁점이다. 국립대와 마찬가지로 사립대의 교육, 연구 활동도 개인과 사회, 나라와 인류 발전에 동등하게 기여한다. 이 점에서 국·사립의 차이가 뭐냐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구미 대학 사례를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대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면 누가 주도해 나서야 할까.
 “대학과 사회, 그리고 언론기관이 함께 나서주면 좋겠다. 우리 모두의 일이다. 경희대는 대학의 미래상을 담아내는 가칭 ‘미래 리포트’를 준비하고 있다. 학생·교수·직원 등 구성원이 생각하는 미래 대학의 모습, 가치, 문제, 극복방안을 담을 것이다. 리포트가 나오면 국·영문으로 제작해 경희의 사례를 국내외 대학사회와 공유할 예정이다. 6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세계대학총장회(IAUP)에서 리포트 초안을 일부 발표하고, 내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개최하는 세계대학총장회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최종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대학의 미래는 사회의 미래이자 인류의 미래다. 학계와 지성계, 그리고 우리 사회가 대학의 미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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