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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감초 조연 성지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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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선생 김봉두'를 보고 나면 끝이 살짝 올라가는 강원도 사투리가 입에 절로 달라붙는다. 산골 분교 아이들의 공이 가장 크지만 소사 춘식 역을 맡은 성지루(35)도 한몫 거든 게 확실하다.

춘식은 투박함 속에 정이 감춰져 있는 그 곳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지만 학교 지붕을 고치다 떨어져 팔.다리를 깁스하는 수난을 겪으며 관객에게 폭소 끝의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아무개 하면 몰라도 어디 어디에 나왔던 누구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얼굴 중 하나가 성지루다.

'신라의 달밤'(2001년)에서 왕년의 경주고 짱 덕섭, '공공의 적'(2002년)에서 마약상 대길, '라이터를 켜라'(2002년)의 천안 깡패 만수. 그리고 지난해 최고 흥행작인 '가문의 영광'에서 김정은의 둘째 오빠까지 눈 밝은 한국영화 팬들에게 그는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본명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얼굴로 자리잡았다.

영화계 데뷔 후 약 2년 반 동안 작품이 끊인 적이 없었고 올 여름에는 SBS 드라마 '선녀와 사기꾼'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니 이름 앞에 '성공'이라는 말을 붙여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을 듯 싶다.

# 오버하지 말자!

충무로에서 그를 부르는 '콜'이 끊이지 않는 비결은 뭘까. 그는 '오버하지 않는다'를 제일로 꼽았다.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찌 됐든 튀어보고 싶은 게 배우의 본능. 특히 몇 장면 나오지 않는 조연들은 더하다. 성지루는 이 부분 만큼은 단호하다.

"좋은 배우란 건 상대방을 잘 받쳐줄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서 멋진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살살 약올리는 게 제가 할 일이죠. 영화는 장면과 장면이 연결돼 만들어지는 건데 저 하나 튀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다음 장면으로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최우선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이런 자세는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뒤 10년 넘게 연극 무대에서 기본기를 다진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대에 서면 관객의 호흡이 곧바로 전달되죠. 상대 배우와 내가 주고받는 연기가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금방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든요. 나를 보이려고 하지 말고 서로 좀더 잘 할 수 있도록 '충동질'하는 법을 그때 배웠습니다."

# 영남.호남에 강원도까지

"제주도 사투리만 해보면 이남 사투리는 다 해보는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지금까지 출연작은 유난히 사투리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의 달밤'의 경상도 사투리, '가문의 영광'의 호남 사투리, 그리고 '선생 김봉두'의 강원도 사투리까지.

정작 그는 충남 공주 태생으로 자란 곳은 대전이며 대학 시절 이후 서울 생활을 했다. 그런 그의 무기는 '녹음 후 암기'다.

"'가문의 영광'때는 직접 '형님'들과 생활을 했어요. 1백20분짜리 테이프 네개를 듣고 또 들으면서 그 사람들 말을 외웠어요. 녹음한 걸 외우는 방법은 '신라의 달밤'때부터 시작한 거예요. '선생 김봉두'는 극중에서 성만이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강원도 출신이라 그 분이 지도를 해줬죠. 영화를 찍은 강원도 산골의 노인분들 대화를 녹음해 연습도 했고요."

이제는 '사투리의 달인' 수준이 됐다. 몇마디만 대화를 나눠도 상대방의 출신지를 얼추 맞힐 수 있을 정도다.

#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그는 살면서 요즘처럼 행복한 적이 없다고 했다. 연극하던 시절에는 안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살림이 넉넉지 못했다. 자동차보험 설계사도 했는데 당시 '나, 김수임'에서 만났던 윤석화씨가 보험을 한꺼번에 세 개나 들어줘 눈물나게 고마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정신없는 촬영 일정에도 지난달부터 리틀엔젤스 회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에 출연하는 건 제작자인 윤씨와 맺은 그런 인연 때문이란다.

"쪼들리지 않을 정도로는 벌 수 있고 절 불러주는 데가 있으니 옛날에 비하면 늘 감사한 마음이죠. 부모님한테 맛있는 식사 대접할 때, 아이들한테 철마다 과일 사 먹일 때, 자주는 못하지만 연극 후배들한테 한턱 낼 때 참 행복합니다."

'성지루 아니었으면 이 역할 할 사람 없었을 것'이라는 요즘의 칭찬도 좋지만 그는 조연으로 만족할 눈치는 아니었다.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야죠. 저라고 주인공 못하겠습니까. 흔히 저를 코믹하고 구수하고 사람 좋다, 이렇게들 보는데 제 안에 있는 다른 면에도 주목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기선민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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