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가쟁명:유주열] 문트(蒙特)장군의 대리석(大理石)

중앙일보

입력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산을 넘어 400km가면 피오르드가 전개되는 아름다운 도시 베르겐에 도착한다. 베르겐은 노르웨이 제2의 도시로 오슬로보다 역사가 오래된 무역항이다. 베르겐 행 열차 내에서는 감미로운 그리그의 음악이 흐른다.

베르겐은 노르웨이의 국민 음악가 그리그(Edvard Grieg)의 도시이다. 그가 살던 집이 기념관으로 되어 있고 그의 집 정원 끝 피오르드 벽면의 천연 동굴에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베르겐은 금년에 특별한 해를 맞이하고 있다. 이 곳 출신으로 중국에 건너 가 서양인으로서는 최초 장군으로 성공한 문트(Johan Munthe 蒙特)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베르겐의 박물관(KODE)은 문트 장군이 기증한, 조각이 아름다운 베이징의 원명원(圓明園) 대리석 기둥 7점을 금년 가을에 중국에 돌려주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문트 장군의 대리석주(marble column) 귀환 소식은 19세기 초 영국의 외교관 엘긴 경(Lord Elgin)이 “엘긴의 대리석(marble)”으로 불리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 간 대리석 조각이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채 아직도 반환되지 않고 있음을 상기 시킨다.

1864년 베르겐에서 태어 난 문트는 기병장교가 된 후 남다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당시 유럽에는 1860년 베이징을 침입한 영불 연합군에 의해 중국(淸) 황실의 하궁(夏宮)인 원명원에서 약탈된 물건들이 흘러들어 와 있었는데 문트는 이러한 중국의 우아한 고미술품에 매력을 느끼고 중국을 동경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1886년 그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은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외국인으로부터 관세를 징수하고 있었다. 영어가 유창한 문트는 리훙장의 관심을 끌어 세관의 관리로 촉탁되고 수년 후 중국을 도와 청일전쟁에도 참전하였다. 문트는 청일전쟁 후 육군의 개편을 주도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중용되면서 승승장구 중국 군대의 장군까지 승진하였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포함한 영국 러시아 독일 등 구미의 8국 연합군대는 베이징을 분할 점령하면서 서로 다투어 중국 황실의 물건을 수없이 약탈해 갔다.

특히 일본군은 주인 없는 자금성에 들어 가 “영락대전” 같은 궁궐의 수많은 전적(典籍)과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군인들은 운반하기가 어려운 물건들은 모두 버리고 갔다.

문트 장군은 50년간 중국에 거주하면서 이러한 중국의 문화재들을 열심히 수집하였다. 그리고 아끼던 고미술품 일부를 자신의 고향 베르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문트 장군은 은퇴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그가 좋아하는 중국에서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즐기면서 생을 마쳤다. 그 때가 1935년으로 그의 나이 71세였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