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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준 국정원장 3분 사과문, 블랙요원 노출 반성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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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내곡동 국정원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장으로서 참담함을 느끼며 고강도 쇄신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뉴시스]

15일 오전 10시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본부 청사.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청사로 초청한 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들 앞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읽어내려갔다. 서울시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14일)가 있고 하루 만에 국정원 측이 긴급히 잡은 기자회견이었다.

 남 원장은 “일부 직원들이 증거 위조로 기소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원장으로서 참담하고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직원들이 연루된 과거 잘못된 관행을 완전히 뿌리 뽑아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뼈를 깎는 개혁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남 원장으로선 다급할 만했다. 재북 화교 출신 간첩 피의자 유우성(34·중국명 류자강)씨 관련 증거 조작은 국정원 대공수사국 이모(54·3급) 처장 등 직원 4명의 공모로 이뤄졌다는 게 검찰 판단이었다. 특히 지난해 9월 말 유씨 북·중 출입국기록에 대한 영사확인서에서부터 올해 2월 중순 중국 창춘(長春)시가 발급한 공증서까지, 증거 조작이 5개월에 걸쳐 치밀하게 저질러진 것으로 드러났다.

 사과문 발표를 전후해 남 원장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낭독에 앞서 카메라를 향해 30초가량 포즈를 취한 그는 A4 두 장에 37줄짜리 사과문을 정확히 3분 동안 읽었다. 이어 ‘질문하겠다’는 기자 수십 명을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회견장을 떠났다.

 이번 사건은 남 원장 재임 시절에 일어났다. 전날 검찰 수사결과 발표에서 “증거 위조를 지시하거나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책임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더 큰 문제는 수사과정에서 국정원 요원과 외부 협조자들의 신원이 백일하에 드러난 데 대해서는 사과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20여 년 북·중 접경지역에서 활동해온 권모(51·자살기도) 과장과 김모(48·구속기소) 과장 등 ‘블랙(비공개)요원’의 신분이 노출됐다. 동북 3성에 구축됐던 정보망도 붕괴됐다.

 전직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이번 사건으로 동북 3성의 휴민트(Humint·정보원)들과 국정원 블랙요원들이 중국 정부는 물론 북한에 알려졌다”며 “해외 정보와 대공 수사 양면에서 무능을 드러낸 데 대해 남 원장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장의 사과는 처음이 아니다. 2005년 8월 김승규 전 국정원장이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 국정원의 불법 도·감청에 대해 사과했었다. 당시 김 전 원장은 “과거 불법감청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한다. 백지에 국가정보원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는 비장한 각오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남 원장의 이날 사과 내용은 불법도청 사건 때와 닮은꼴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9년 전에서 나아진 게 없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 법원 관계자는 “사법질서의 근간을 해친 직원들의 범죄에 대해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잘못된 관행’ 정도로 치부하는 사과를 한 것은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한편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15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해 “검찰의 구성원이 공판 과정에서 잘못된 증거를 결과적으로 법원에 제출되게 한 점에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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