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사건, 김정일이 깊이 개입"|미 랜드 연 극동문제전문가 필즈베리, 김영희 특파원과 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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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판문점사건은 강경 노선을 내세워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려 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깊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미 랜드연구소의 극동문제전문가 마이클·필즈베리 씨가 29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그는 또 과거의 예로 보아 김일성은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숙청함으로써 자신의 양보를 불가피하게 한 이번 사건의 책임을 벗으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남북대화의 재개와 같은 방향으로 평양 측의 정책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다음은 필즈베리 씨와의 문답내용.
김 특파원=판문점사건의 수습에 중공이 맡은 중재역할은 어느 정도라고 보는가?
필즈베리=『중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미국이 힘으로 개입할 경우의 위험성을 북괴에 설명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중공은 북괴보다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북괴는 말하자면 미국의 지도자들과 정책입안자들과는 일체 관계를 끊고 일종의 은둔상태에 있다. 반면 중공은 미국과 연락사무소를 교환하고 있고 미국 대통령들이 두 번이나 중공을 방문하여 미국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많은 기회를 가졌다.
따라서 중공은 미국과 관련된 어떤 행동의 결과를 보다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북괴는 미국의 강력한 반응에 놀랐을 것이고 중공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을 수 있다. 결국 중공은 김일성이 자기의 부하들한테서는 들을 수 없는 충고를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김일성은 위험인물인데 그것은 김의 부하들이 미국의 정책에는 무식하여 미국이 취할 반응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국봉 취임 후 중공의 북괴정책에 주목할 만한 징조라도 있는가?
『없는 것 같다. 중공의 북괴에 대한 마지막 중요정책의 천명은 75년 4월 김일성의 북경방문 당시 등소평이 한 연설이다. 등은 북괴의 평화통일정책이라는 것을 지지하고 중공으로서는 처음으로 북괴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김일성의 주장을 지지했다.』
-키신저가 사건수습에 소련은 관련시키지 않고 중공만을 주로 끌어들인 사실은 북괴-중공-소련의 삼각관계로 보아서 무슨 의미인가?
『두 가지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소련이 지난30년 동안 북괴에 대한군원을 혼자 맡아 오다가 최근 2∼3년 전부터는 중공의 원조가 소련의 원조보다 많아졌다. 양적으로 비슷하다고 해도 중공의 원조가 중요성을 차지하게 됐다. 따라서 키신저가 중공대사하고만 만난다면 그것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중공은 김일성에 대해 소련보다 영향력이 크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4개 당사자회의 구상에서 소련이 제외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한국문제에 관한 한 소련을 아시아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여기서 암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는 중공의 입장도 미국과 일치한다. 미국·중공 모두가 소련의 아시아 집단안보체제 제의를 반대하고 있다.』
-김일성 회답과 판문점 분할경비 안은 북괴의 양보를 뜻하는가?
『그렇다. 공동경비구역의 분할경비는 미국이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것이다. 그것을 북괴가 마침내 수락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큰 양보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독창적인 구상인 듯이 위장하려 할 뿐이다.
미국은 공동경비구역의 남쪽 부분에 있는 북괴의 초소를 폐쇄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북괴는 이 문제에서도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린 것 같다. 분할경비제안이 자기들것이라고 했으니까 미국의 그런 요구를 안 들으면 결과적으로는 자기들의 구상이 실현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놀랍게도 양보를 했다는 사실이 한국문제 해결에 어떤 장기적인 작용을 할 것인가?
『두 가지 추측을 해보겠다. 김일성은 미국의 강경한 반응으로 수세에 몰렸다. 그 결과 북괴에서는 주도권을 되찾는 수단으로 좀더 양보를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예상해도 좋을 것이다. 주도권회복을 위한 양보는 남-북한의 대화의 재개, 군사행동의 축소, 기타 다른 분야에서 나타날지 모른다.
두 번째 지적하고 싶은 추측은 68년과 69년에 있었던 사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북괴는 65년부터 한국에 대한 도발을 증가시켜서 68년 1월22일에는 특공대에 의한 청와대습격시도를 위시한 큰 사건을 일으키고 69년에는 EC-121 격추사건을 일으켰다.
1·21사건과 푸에블로 납치사건이 일어난 68년에는 8백 여건의 북괴도발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들이 노린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는커녕 북괴에 대한 방위태세가 강화됐다. 그래서 69년 북괴에서는 68년 사건의 책임자들을 숙청했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은 어떤 정책이 실패하면 그것을 주장한 사람을 잘라 버린다. 그는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라 실책은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판문점사건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면 책임자가 좌천되거나 숙청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거기다가 김일성은 수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시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양상을 통해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가 찾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느린 사태의 진전이라 나는 가까운 장래에 한국이 통일될 것이라는 예측은 하지 않겠다.
여기서 내가 다시 개인적인 추측을 하나 한다면 판문점사건에 김정일이 관련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정일은 군사문제에도 책임을 지고 있다.』
-판문점사건이 북괴의 권력투쟁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인가?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지난해인가에 김정일이 강경 논자로 인정받을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강경한 반응으로 김이 굴복하는 사태가 생겨서 사정은 바뀌었다.
미국의 강경 반응으로 판문점사건의 주동자들은 굴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김정일이 그런 주동자의 한사람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희소식이라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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