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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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세태는 자고 일어나면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는 꼴이 돼 가고 있다.
지난주 여 운전사 살인강도사건으로 질렸던 사람들은 판문점의 도끼살인으로 야기된 긴박한 상황변화에 따라 본능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가 하면 5백원권 위 폐 사건의 범죄기법에 놀란 것도 잠깐, 추석 도범 소탕 령이 내려진 서울에서, 사흘동안 잇달아 3건이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그뿐인가, 26일에는 서울의 대낮 번화가에 은행강도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한밤에 1천만원대 마취강도사건과 함께 엽기적인 대로상의 부부 변 시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매일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면서 누구에게나 지금 우리 사회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본래 사회적인 큰 사건이란 이유 없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간단히 스러지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건이 파괴적인 무기와 인간성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잔인성을 나타내는 것일 경우에는 그 흔적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발자취를 남기는 법이다.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처럼 날로 늘어나고 있는 잔 인과 포악성의 까닭 없는 발현은 결코 경시해서는 안될 역사적 경고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는 곳에서는 범죄가 으레 보편화하고 폭력화·조직화하게 마련이라고 이야기한다.
주로 물질적 풍요를 목표로 한 근대화에의 몸부림이 자칫 정신적 가치나 인간애의 호소 같은 것을 한낱 약자의 하소연으로 빈 축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목적의 정당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비겁한 행동조차도 미화되기 일쑤이고, 불법적으로 쟁취된 환락이 당당한 성공의 심벌처럼 주장되는 사례가 다반사처럼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오늘의 사회는 정신적 가치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물질적 향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 추세인 것 같다. 당연히 나물 먹고 물 마시며, 팔 베고 누워서 정신적 열 락을 추구하겠다던 조상들의 기개 같은 것은 한낱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 사람은 이제 무능한 인간이거나, 시대착오의 존재로 취급될밖에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개인들은 이 욕의 노예이며 이기심의 사자가 되어『만인이 만인에 대한 이리』로서 존재할 뿐 인간적인 멋과 인간적 사랑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면 과언일까.
여기서는 차디찬 미소나 비열한 웃음은 있을지언정, 인간이 인간을 믿고 의지하는 의미의 정다운 웃음은 없게 된 것이다. 하물며 어찌 삼처전심 같은 은밀한 정이 있으랴.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주장이나 도덕적 생활태도를 강조하는 숱한 호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칫 위선의 넋두리거나 시대를 모르는 망발, 아니면 할 일 없는 호사가들의 잠꼬대 정도로 비웃음을 받기 일쑤인 것이다.
이렇듯 각박한 삶에 지치고 허울좋은 이름들에 짓밟히고 이용되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 희망이나 정신적 여유란 어찌 보면 사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참되게 살려는 사람들은 그러기에 이런 좌절 가운데서야말로 인간의지의 순수성에 늘 빛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포기하고 물러설 수 없는 인간적 의지의 약동이 결국 역사를 움직여 온 원동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잔학한 범죄가 인간절망의 한 순간을 경험하게 하며 사회적 부조리가 욕된 삶에 대한 회의를 깊게 하면 할수록 밝은 사회, 의로운 삶에 대한동경이 더욱 큰 힘을 발의함으로써 인류역사는 전진해 왔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는 이 험난한 오늘에 살면서도 저 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언제나 우러러 볼 수 있는 국민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찌푸리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에 잠긴 채 웃음을 머금는 그 미륵부처의 원만한 표정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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