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이란 사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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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외교관은 언제나「예스」와「노」에 게을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영국 외무성 차관을 지낸「R·밴시터트」와 같은 사람은「현명하고 게으른 사람」을 제1급의 외교관으로 평가했었다. 뼈 있는 풍자다. 최근 판문점사태를 처리하는 미국의 태도는 이를테면 이런 「외교사령」을 벗어나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우선 가해자인 북괴의 김일성은 지극히 모호한 문구 속에「유감」이라는 단어를 담아 피해자인 미국에 해명했었다. 그에 앞서 미 국무장관「키신저」는「적절한 해명과 배상」을 요구했었다.
배상이란 제1차 대전이후「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징벌의 의미를 포함하기 위해「리퍼레이션」(Reparation)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종래의「인뎀니티」(Indemnity)라는 용어와는「뉘앙스」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인뎀니티」는 너그럽게 봐준다는 인상이 강하다.
「키신저」는 분명히 그「인뎀니티」가 아닌「리퍼레이션」이라고 했었다.
미국은 기어이 힘의 시위 끝에 북괴의 해명을 받긴 받았다. 그러나 즉각 그것을 수락할 수 없다(Unacceptable)고 공식 발표했었다. 어감으로 보아 분명하고 단호했다.
그러나 상황은 낮과 밤사이에 바뀌었다.「어넉셉터블」(수락할 수 없다) 이라는 단어가 하루만에「포지티브·스텝」으로 변질된 것이다.「포지티브·스텝」이란 문자그대로「긍정적인 단계」라는 뜻이다. 뜻도 선명할 뿐 아니라 단어의 빛깔도 강하다.
미국의 백악관과 국무성 대변인들이 즐겨(?)쓰는 말들은 따로 있다. 외교관계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들은 좀 체로「예스」와「노」가 노출되지 않는다.「수락할 수 없다」는 것은 윤곽이 뚜렷한 최상급의 표현이고, 그밖에는 긍정의 부정」「부정의 부정」「부정의 긍정」등 교묘한 곡예의 화술들이 동원된다.「비가 온다고 생각지는 않는다」,「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식이다. 한마디로 될 말을 꽈배기로 엮는 것이다. 때로는「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라고도 한다. 그쯤 되면 저쪽은 적어도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안심해도 된다.
그러나 이번 판문점사태의 경우는 미국무성의 변명을 감안하고라도「선회」가 너무도 급하다. 자동차가 급「커브」를 틀 때의 충격을 연상하게 된다. 분명히「리퍼레이션」을 요구했던「키신저」까지도 그것은「보장」을 뜻한다고 한 걸음 물러선다.
이런 일들은 한 시정인의 범상한 상상력으로는 어떻게도 풀이할 수가 없다.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키신저」와 중공의 황 진(「워싱턴」주재 연락사무소장)과의 접촉,「포드」의 선거 전략에서 어떤 해답을 찾을 만도 하다.
여하튼「미친 개」를 옆에 둔 우리의 입맛은 결코 달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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