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광복31주년…각계인사가 말하는 그 날의 비화|조연명(조형 진씨 장남 조민당 준비위원장)(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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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0월 어느 날로 기억된다. 하루는 고려「호텔」에 누런 군복을 입고가죽장화를 신은 청년5∼6명이 찾아왔다.
그 중의 하나가 송효경 비서실장에게『김일성 장군이 환국 하셨습니다. 조위원장을 만나 뵈러 왔으니 안내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송 실장이『김장 군이 지금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일행 중의 한사람이 불쑥 앞으로나 섰다. 자기가 김일성이라는 것이다.
김일성 하면 머리가 허연 노장군을 연상해왔던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머리만을 조금 기르고 뒷머리는 바짝 치켜 깎은 모습이 나처럼.30대 초반밖에 안돼 보이지 않는가.
그는 아버님 방에 들어가 한30분 이야기한 후 돌아갔다.
내가 방에 들어가니 아버님께서는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서 적어도 내나 이쯤은 된 줄 알았는데 연명이 네 나이 또래밖에 안 돼 더구나. 그렇다고 당신은 가짜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난처했다』고 하셨다. 그 후 그는 고려「호텔」에 자주 나타나 가끔 나와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도 많았다. 나는 그를「김형」이라고 불렀고 그도 나를 「조형」이라고 불렀다.
해외에서 들어온 김두봉 무정 최용건도 귀국인사차 고려「호텔」에 온 적이 있다.
아버님 깨서 오산학교교장으로 계실 때 이 학교를 다녔다는 최용건은 아버님께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었다.
접견실에 아버님이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최는 얼른 내려서 무릎을 꿇고 넓죽 큰절을 했다.
『선생님의 명성은 잘 들어왔습니다. 해외로 도피하시지 않고 국내에서 끝까지 무저항 불복종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고 인사를 올리더니 최는『앞으로 선생님의 수족이 되어 무엇이든 지하겠으니 하명만 해주십시오』라고도 했다.
민족진영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학생운동기념일인 그 해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아버님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105인 사건을 생각해서 발기인을 105명으로 하고 3·1운동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중앙위원을 33명으로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문제가 생기면서 북한의 민족진영은 결정적인 어려움을 맞았다.
소련군의 저의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인민 정치위의 민족진영위원들은 반수이상 월남해버렸다. 아버님과 박현숙 이윤형 김병연 한근조 이종현 백남홍씨 등 7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로마넹코」는 신탁에 대한찬반을 표결로 결정하라고 강요했다.「우리말만 잘 들으면 당신을 여기의 「스탈린」으로 만들어주고 김일성은 국방이나 담당케 하겠다』고 회유도 했다.
이보다 앞서 12월 중순 조민당 중앙위를 열어『신탁은 지지할 수 없다』고 성명하신 아버님 은 정치 위의 위원장직을 던져버렸다.
아버님이 사표를 내신 이듬해1월5일 저녁 고려 「호텔」에는 당장 소련군과 보안서원10여명이 파견되었다. 그 날부터 연금에 들어간 것이다.
이날이 올 것을 예견하셨던 아버님께서는 며칠 전에 나를 불러 미리 써두셨던 편지 석장을 내주시면서 서울로 탈출하라고 하셨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 등 앞으로 된 친서였다.
아버님께서는 장성한 뒤론 처음으로『목욕이나 같이하자』고 하시고는 탕 안에서 이 계획을 말씀하신 뒤 『이일이 끝난 다음 나 때문에 다시 평양에 올 생각 말아라』『특별한 용건 없이 서울정계의 인사들을 방문하지 말라』는 엄명도 함께 내리셨다.
나는 곧바로 변장을 했다. 소련군처럼 긴 장화를 신고 일본군 털외투를 걸친 다음 안경을 꼈다. 만일의 경우 소련군에게 줄 뇌물로 군표 시계 등도 준비했다. 뒷문에 준비해둔 차에 몸을 싣고 그 날밤으로 비서실의 한사람과 함께 평양시내를 빠져 나왔다.
얼어붙은 대동강 빙판을 건너 밤새껏 산길을 타고 넘었으나 이튿날 어느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고 지명을 물으니 평양서 겨우 20리밖에 오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대담하게 큰길로 내려갔다. 마침 지나가는「트럭」이 있어 손을 들었다.
해주에서 평양 왔다가는 해주 보안서 차이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문득 평양에서 판치고 있는 공산당의 거두 장시우가 생각났다. 장의 이름을 팔았다.
『장시우 동무의 명령으로 해주대에 내려가는 길이다』고하니 조수석을 얼른 비워주는 것이다. 원체 거물 이름을 대서인지 증명 보자는 말 한마디 없다.
노동당 해주시 당 앞에 차가 멎었다.
들어가는 체하고 머뭇거리다 조민 당을 찾아들었다. 위원장이 소련말 통역과 지름길안내자까지 붙여 줘 8일에는 무사히 38선 바로 너머 청단에 이를 수가 있었다.
서울에 와보니 공산당치하에 들어간 평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자유가 너무 넘쳐흐르는 듯 했다.우익은 우익대로 좌익은 좌익대로 서울운동장과 남산에서 매일같이「데모」틀 벌이는가하면 별의별 정당들이 난립하여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동화백화점 낙원동 일대 등에「댄스·홀」이라는 게 생겨「지르박」·「탱고」의 가무가 유행되어 가는 서울의 모습이 적도에 아버님을 뺏기고 탈출해온 나에겐 이방에 온 것만 같았다. 벌써 30년이 지난 일들이다.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드리며 너무도 여윈 모습에 울먹이는 나를 보고『울지 마라』고 오히려 위로해주시던 아버님모습이 마지막일 줄이야. 그때는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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