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719)|제 52화 서화백년(5)-제자·김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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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창덕궁 입궐>
덕수궁 전하는 나의 초본그림을 받아보고 만족한 뜻을 전해왔다.
전하는 윤덕영을 불렀다. 윤덕영은 윤비의 큰아버지였다. 그는 당시에 궁중의 모든 일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윤대감이 고종의 부름을 받고 덕수궁에 오자 전하는 『지금 내 초상을 그리고 있는 일본의사를 중도에서 물리쳐 버리면 그들이 공연히 말썽을 부릴 것이니 김은호란 청년을 먼저 창덕궁에 보내 그촉 어진부터 그리도록 하시오』 하고 하명했다.
고종의 하명을 받고 윤덕영이 집에 돌아갔을때 그의 사랑방에는 마침 전부터 자주 출입하는 고서상 이양산이 와 있었다. 이양산은 본명이 희원이었으나 양산군수를 지내 이양산으로 통했다.
그는 고서뿐 아니라 서화재료 일체를 중상하고 있어 서화 미술회에드 자주 드나들었다.
이런 그에게 윤대감은 서화학도인 나의 내막을 물어 본 것이다.
양산은 내가 어용화사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일 처럼 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안동교회의 장로로 나와는 한 교수였기 매문이다.
이말을 듣고 단숨에 달려온 양산은 다짜고짜로 내손을 잡고 벽수 대감 (윤덕영의 호가 벽수)에게 가자고 끌었다.
벽수대감의 집은 벽동(지금 한국일보앞 미대사관 관사부근)에 있었다.
나는 양산의 뒤를 따라 벽수대감 집으로 갔다. 대감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공손히 큰절을 하고 부릎꿇고 앉으니 대감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는 동생이 되는 윤택영후작을 기다리자고 했다.
윤택영은 동생이지만 윤비의 친아버지여서 일제로부터 그보다 한계급 높은 작위를 얻어가지고 있었다.
벽수대감 형제의 집은 서로 숲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어 그사이에 가설된 구름다리로 내왕했다.
이윽고 윤택영이 구름다리를 타고 형님집에 왔다. 벽수대감은 나를 그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나서『나는 오늘 파주 선영엘 좀 다녀와야겠으니 자네가 이청년울 데리고 창덕궁으로 들어가 주게』하고 동생에게 말했다. 윤택영은 형님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를 데리고 송현의 자기집으로 갔다. 송현집에 이르자 윤택형은 대뜸 『자네,「프록·코트」를 갖고 있나?』하고 물었다.
호화롭고 값비싼 외제의 귀족복을 가난한 서학학도가 무슨 돈으로 마련해 가지고 있을 것인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윤택영은 빙그레 웃더니 청지기를 불러 「프록·코트」를 내오라고 했다.
『자, 한번 입어보게. 맞나 안맞나. 평복으로는 어전에 못들어가는 법일세.』
생전 처음 입어보는 귀족복 이어서 좀 어색했지만 그리 흉하지는 않았다.
윤택영은 나애게「프록·코트」를 싸주며 이틀후인 목요일 아침에 깨끗이 입고 오라고 했다. 그날은 창덕궁에서 귀족들의 오찬이 있어서 기회가 좋다고 덧붙였다.
「프록·코트」는 빌어 입었지만 받쳐입을 속옷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심전 선생을 찾아갔다.
그동안 윤대감 형제집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여쭈었다.
심전선생은 마침 서화회에 나와 있는 양산을 불러 「와이샤쓰「넥타이」등을 사주라고 했다.
저녁때 귀족복과 값비싼 속옷들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갔더니 어머니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셨다.
아내도 조용히 웃음지으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약속한날 아침 나는 의젓하게 차리고 송현으로 갔다. 윤후병의 자가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서울 장안에 자가용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강 공과 윤석영뿐이었던 것으로 안다.
자동차는 돈화문을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서 멎었다. 나를 장시사 (대기소)에 남겨두고 윤후작은 인정전으로 들어갔다.
한시간쯤 기다렸을까. 사정(궁내경비원)이 나를 불렀다. 그는 공손히 나를 인정전 동행각으로 안내했다.
인정전 안에선 방금 오찬을 끝낸 귀족들이 점잖게 둘러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주 목요일에 모임이 있었고 그날은 특히 재등총독과 정무총감까지 참석하고 있었다.
윤후작은 나의 손을 잡고 먼저 이강 공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번 이왕 전하의 어진을 모시게된 김은호란 청년화가입니다』하고 소개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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