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근 목사<서울수색감리교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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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수난자와 방관자>
며칠전 신문에 실린 사진 한장은 유난히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데가 있었다.
스무살 가량의 여인이 물위에 잠자듯이 누워있고, 그 상황을 미루어보아 한두 차례 부침을 계속하는 가운데 이미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로 뒤에 마치 배경처럼 한강인도교가 걸려있고 백여명은 됨직한 구경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강물에는 두 사람의 미군병사가 정복을 입은 채로 위기에 놓여있는 이 여인을 향하여 익숙하지 않은 몸짓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헤엄쳐 가고 있었다.
이야기인즉, 고향을 떠나 온갖 역경과 각고 끝에 기술을 터득하고 기반을 닦아 행복을 얻으려는 참에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한강다리에서 몸을 던져 간단히 인생을 청산해버리려고 한데서 일어난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였다.
이 사건을 지켜보는 가운데 부지중에 사건의 인물을 나와 내 자녀와 바꿔 놓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유형의 인간 곧 수난자, 방관자, 그리고 착한 이웃을 본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어느 부류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도 생각해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그 사건의 주인공에게 주고싶은 말이 있다. 죽기까지 고민했던 그 심정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지난날의 그처럼 살려고 했던 삶의 의지를 소중히 간직해 줄 것과, 나만이 인생의 피해자라고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과, 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강변에서 인생의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문제해결의 장소가 못 된다고 하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생명사랑이 곧 선>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가 그의 철학의 기반을 『생명의 존중』에 둔 것은, 그가 독목선을 타고「오고웽」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죽음에 포위된 생명들이「정글」의 동물과 뒤범벅이 되어서도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군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문명의 몰락을 예언하고 소위 풍요사회가 올 때에 파생될 극도의 이기주의나 무관심에서 결과될 생명의 경시를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는 입버릇처럼『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선이다』고 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명성을 팽개치고 조그마한 진찰가방만을 든 채 밀림 속에서의 밀알로 파묻힌 동기인 것이다.
그의 예언은 적중하고 인류는 드디어 가장 무서운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비·콕스」라는 신학자는 현대문명의 부산물 중에 무명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 특수성을 무시한 채 인간을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하게 되고, 이름 대신에 번호를 붙여 비인간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는 인간 생명이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현대문명의 산물>
또 우리는 다리 위에 서서 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우리를 찾아본다.
이런 의미에서 유명한 선한 이웃의 얘기는 현대인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사마리아」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냉정한 방관자로서의 종교지도자나 귀족계급을 들고있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사마리아」사람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선한 이웃이 되고자 한 것처럼 수영도 잘 하지 못하면서 선한 이웃의 책임을 감당한 우방의 병사들에게 모두 뜨거운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선한 이웃이 된다는 것, 이것은 현대인의 과제이며, 기쁨이요, 삶의 보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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