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항71돌…부관정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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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숱한 애환과「로맨스」, 8·15의 환희와 패전의 비극을 현해탄에 담아온 부관정기선이 8윌1일로 취항 일흔한돌을 맞는다.
일제가「아시아」대륙을 향한 현관으로 침략의 발판을 삼기위해 부산과「시모노세끼」 (하관) 사이에 첫 연락선을 띄운것은 1905년 8월 1일.
경부철도가 개통되자 일본 산양기선주식회사가 일기환 (1천9백62t)을 새로 건조, 제국군대의 장비와 인력을 부산에 쏟아놓으면서 이름을「관부연락선」이라고 붙였다.
당시 부산의 기항지는 북빈부두 (현 상공회의소 뒤 화물부두)로 나무 널빤지를 이은 잔교를 만들어 임시부두로 사용하다 1912년 제1부두 (현「페리」부두)를 완공,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일기환를 시작으로 대마환 (l천9백51t)이 뒤따라 취항했고 1908년 부산∼신의주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본인의 왕래와 물동량이 크게늘자 살마구(1천9백39t)「우메가(향)구」「사꾸라구」등이 잇달아 취항했다.
1911년에는 2천6백t급의 홍제구이 또 진수되어 부산∼하관사이에는 6척의 연박선이 고동소리를 높였다.
연락선이「러쉬」를 이룬 가운데 슬픈조선의 청춘남녀들과 독립지사들의 피눈물을 실어나른 배는 천산구과 곤??륜구.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뗘난다…』이유행가는 70여만명의 조선 청년을 강제징용으로 또는 학도병으로 실어나른 두 철선에 맺힌 부녀자들의 한을 노래한 것이었다.
『현해탄의 여왕』으로 일제가 자랑하던 7천5백t급의 흥안환(전장 1백27m·폭18m) 2차대전 종전후「맥아더」사령부에 징발되어 대륙에서의 일본인수송, 재일한국인 귀환업무, 6· 25동란 땐「유엔」군 수송선으로 사용되다 52년 퇴역했다.
해방후 5년동안 끊어졌던 한일바닷길이 다시 열린 것은 70년 6월 16일.
4·19후 1백50t급「쓰바끼마루」와「간스이마루」가·부정기적으로 운항되어오다 이때 한일합작 부관「페리」회사가 설립되어 정기노선을 취항시켰다.
여객기의 발달로 대부분의 한일간 승객을 비행기에 빼겼지만 3천8백t급 호화「페리」가 취항하면서 옛날의 활기가 웬만큼 되살아났다.
금년 7월10일부터는 5천t급 새「페리」가 매주 3회 취항하고 있다.
일제때 운항했던 7천5백t급의 흥안환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시선은 앞서의 3천t급보다 크게 향상된 것.
지난 6년간 수송실적은 승객 30만5천6백여명과 52만4천t의 화물.
일본인 관광객을 붙들고 역겨운 아양을 부리는 여인들의 모습이 눈샅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일본 고교생들의 단체여행 뒤 90% 이상이『기존 한국 관념을 고첬다』는「앙케트」조사결과는 부관「페리」의 새로운 역할을 보여주기도 했다.
징용으로 끌려갔다 지난 4월3일 35년만에 조총련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페리」를 타고왔던 배욱일씨(55·일본 산구현거주)는「페리」부두에 내려『부관연락선으로 일본으로 끌려갔던 바로 이자리에 부관「페리」로 되돌아오니 감회가 깊다』고 눈물지으며 강제징용의 그날을 되새겼다.
부관연락선에 얽힌 애환의 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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