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적지 개발의 의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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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가 추진키로한 6.25 전적지 개발사업은 전적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켜 국가안보의식을 제고시키고 나아가 부족한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6·25 전란을 통해 전사적(전사적)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전적지는 전국적으로 2백34개소에 이르고 있으나 이가운데 50개소는 북한에 자리잡고있어 실제 개발가능한 전적지는 남한전역에 산재한 1백84개소다. 이가운데 우선 50개소를 내년부터 5개년계획으로 연차적으로 개발한다는 것이 교통부의 방침. 그러나 구채적인 기념전시관설립예정지등은 아직 결정되지 않고 있다.
개발대상전적지는 기념전시관등을 갖춘 건립비 1억원 규모의 「가」 형과 전적비등만 세우는 3천만원규모의「나」영역으로 구분, 지역실정에 따라 알맞은 규모를 택하게 된다.
「가」형의 경우에는 처절했던 당시의 전황을 실감할수 있는 모형등 자료롤 수집, 전시할 방침이다.
예컨대 영동고속도로의 대관령휴계소에 건립된 이승복 반공기념관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된다.
개발대장전적지는 주로 작전단계별로구분, 선정하고 지리산·한라산등 공비토벌지구 2개소를 포함시켰다.
초기방어단계의 전적기는 6·25가 발발한 50년6월25일 상오4시부터그해 6월27일까지 3일간 아군제2, 7사단이 북괴의 제3,4사단 및 제107, 109전차데대와 접전을 벌였던 의정부·춘천·강릉등 지역이다.
철수단계 전적지는 6월28일「유엔」군사령부가 설치된 후 지연전을 벌였던 금강일대와 대전지역.
50년 7윌31일∼8월14일까지 낙동강을 사이에두고 공방전을 벌였던 왜관등은 낙동강방어작전지구에 포함됐다.
반격단계 격전지는 50년9윌15일 인천상륙작전 및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을폈던 지역과35도선을 돌파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 다시 반격작전을 펴 현전선인 휴전선이 이루어질때까지의 격전지다.
이가운데 철원에 마련될 백마고지 격전지는 철원펑야의 요충지인 백마고지를 확보하기위해 7차례에 걸쳐 침공해온 적군을 아군이 백병전으로 물리쳐 최후까지 수호했던 피의결전장. 백마고지전투는 휴전을 앞둔 52년10월6일∼10월15일까지 아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이 필사의 싸움을 벌었던 곳으로 그해10윌7일과 8일 이틀등안은 고지의 주인이 2번이나 바뀐곳이다.
이전투에서 아군은 중공군 5천97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중화기 9백60여점을 노획, 중공군을 재기불능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아군도 5백5명이전사하고 2천5백26명이 부상했다.
이제 통일의 비원을 안은채 백마고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을선정, 건립될 기념관에는 그날의 전황을 되새겨주는 용사들의 유품·서신·군장비둥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이번 전적지개발사업은 국방부전사펀찬위원희등 전문단체등이 참여, 추진하고있다.
그러나 6·25가 발발한지 26년이지난 뒤에야 이사업이 시작되는 탓으로 잔뮤품이 충분치 못한데다 격전지등의 원형이 보존되지않아 자료수집의애로등 문젯점이 적지않다. 뿐만아니라 전적지의 대부분이 험준한 산간고지등에 자리잡아 도로여건등으로 미뤄 얼마만큼의 관광객을 유치할수 있을는지도 미지수이다. <봉창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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