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곡물 파동의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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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73년 말부터 일기 시작했던 원산 가격 파동과 그 뒤를 이은 여러 자원 파동이 세계 경제를 엄청나게 뒤흔들었고, 그 여파가 75년에 이르기까지도 계속되었던 사실을 상기할 때, 올해 들어 기상 이변으로 전세계에 퍼지고 있는 가뭄·냉해 등의 여파는 어쩌면 제2의 곡물 파동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원 파동의 여파를 가까스로 수습해서 겨우 물가 안정의 기틀을 잡고, 이제 본격적으로 경기가 회복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만일 세계 경제에 또 하나의 충격이 가해지게 된다면 앞으로 몇 해 동안 세계 경제가 다시 한번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 것은 명약관화하다.
외신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국제 곡물 시장의 화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닌 소련·중공의 작황이 올해의 이상 기후로 매우 나쁠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가장 안정세를 누려왔던 EC지역의 농업도 10∼20%의 감수가 불가피하리라는 전망이다. 또 세계 제1의 곡물 수출국인 미국의 사정도 예외가 아니어서 「포드」 미국 대통령도 이미 긴급 사태를 선언하고 비상 대책을 추진할 정도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범세계적인 흉작 가능성은 주요 원자재 가격의 앙등을 촉발시켜 「로이터」 상품 가격 지수가 74년 자원 파동 때의 「피크」를 돌파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으며, 미국의 곡물 재고도 계속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적인 흉작은 이미 기정 사실화한 것이나 다름없는 만큼 그 후유증에 대해서 각국은 벌써부터 손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농산물 등 자연 자원은 조금만 모자라도 그 가격이 폭등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때 심각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우기 74년의 자원 파동 과정에서 각국은 이미 그러한 정치적인 가격 형성의 심각한 양상을 경험한 바 있는 터이므로 흉작의 깊이가 클수록 세계 경제는 또 한차례 큰 파동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원 가격의 폭동은 자원 보유국의 국제 수지를 급속히 개선시키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나라의 국제 수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국제 무역 및 통화 질서를 교란시킨다. 또 대부분의 경우 공업선진국은 자원 가격을 제품 수출 가격에 전가시켜 큰 부담을 지지 않을 수도 있는데 비해서 개발도상국은 원자재 가격 상승에 대한 부담과 아울러 모든 수입품 가격의 상승이라는 2중의 부담을 지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국제 수지가 교란될 때 수출 경쟁이 격화되고 수입 억제 시책이 상승적으로 강화되게 마련이며, 그 결과로 선진국은 이득을 보는 반면 개도국은 큰 피해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2중·3중의 무거운 부담이 개도국에 집중되는 사실은 74년 이후의 파동에서 우리도 생생하게 경험한 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로선 이 계제에 식량 자급과 농정에 대한 인식부터 다시 한번 고쳐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증산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면, 금새 곡물 생산 지원 정책에 열의를 잃고 마는 경향이 있다. 특히 증산 시책이 물가 정책 때문에 크게 제약을 당하곤 하던 관행은 차제에 혁파되어야 하겠다. 어차피 세계 식량 사정이 만성적인 부족을 겪어야하는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한다면 우리로선 식량 자급 정책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장기 정책으로 흔들림 없이 추진되어야한다.
또 당면해서 올해의 곡물 생산을 한해로부터 최대한 구제하는 노력을 더욱 강화하는데도 더한층 박차를 가해야 하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가 깊이 검토해야할 것은 식량 파동→자원 파동→「인플레」의 앙진→국제 무역 및 통화 질서의 교란이라는 공식적 과정에 대처해서 우리의 국내 정책을 어떻게 조정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무역 의존도가 80%선에 육박하고 있는 우리의 실정 하에서는 세계 경제의 파동은 곧 국내 경제의 파동을 예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깨달아야한다.
이와 관련해서 정책은 우리의 수출 전망을 시급히 재점검할 뿐만 아니라 수입 「코스트」상승에 대비한 국제 수지 조정 방안도 미리 준비, 그에 따른 투자·성장·물가 정책에 대한 대비 방안도 서둘러 마련해 두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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