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정책엔 저작권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강갑생 기자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강갑생
JTBC 사회1부장

지방선거가 50여 일 남았다. 곳곳에서 경쟁이 불붙고 있다. 서울은 특히 치열하다. 박원순 시장에 김황식 전 총리, 정몽준 의원 등 면면이 화려하다. 그런데 이들 간 경쟁에서 재밌는 현상이 하나 눈에 띈다. 선보이는 정책이나 공약이 어디선가 다 많이 본 듯하다는 점이다. 박원순 시장부터 예를 들어보자. 올해 들어 박 시장은 굵직한 개발정책을 여러 개 내놓았다. 우선 1월 말에 강북·노원·도봉구 등 동북 지역을 대규모 개발하는 ‘행복 4구 플랜’을 발표했다. 지하철 4호선 창동차량기지와 도봉면허시험장을 이전하고 그 자리에 대형 컨벤션 센터와 호텔, 상업시설을 짓겠다는 계획이다. 2009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밝혔던 동북권 개발 계획과 많이 닮았다. 2월에 내놓은 수색역과 상암 DMC역 일대 개발 계획도 마찬가지다. 2007년 코레일과 서울시가 함께 추진하다 실패한 사업과 판박이다. 얼마 전 발표한 삼성역~종합운동장역 사이 국제교류지구 조성사업도 2008년 오 전 시장의 계획을 떠올리게 한다.

 정몽준 의원은 용산 재개발을 붙잡고 있다. 역시 오 전 시장이 코레일과 공동으로 추진한 대규모 사업이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 악화에다 사업자 간 분란 등 여러 악재가 겹쳐 지금은 무산됐다. 김황식 전 총리는 최근 성수전략정비구역을 찾았다. 오 전 시장 시절 추진한 한강르네상스의 주요 대상지다. 김 전 총리는 이 사업을 내세워 “박 시장의 서랍 속 규제로 인해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공격했다. 자신이 당선되면 해당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유력 후보 간에 정책 따라 하기로 보이는 사례도 있다. 김 전 총리는 교통 공약에서 신분당선을 시청까지 조기에 연장하겠다고 했다. 이어 은평뉴타운, 더 나아가서는 파주까지 잇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분당에서 강남을 연결하는 신분당선을 시청과 은평뉴타운까지 연장하는 사업은 현재도 서울시가 공들여 추진하고 있다. 다만 민자사업이다 보니 진척이 더딜 뿐이다. 박 시장 입장에선 자신이 이미 애쓰고 있는 일을 김 전 총리가 새 공약인 것처럼 내걸었다고 생각할 만하다. 이 때문인지 후보들 간에는 ‘과거 시장 정책 베끼기’ ‘실패한 정책 따라 하기’ 같은 날 선 공방도 오간다.

 언론계엔 이런 말이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기사는 없다’. 과거에 나왔던 기사라도 현재까지 달라진 게 없고 여전히 문제라면 다시 써도 된다는 의미다. 정책이나 공약도 다를 바 없다. 이행되지 않은 공약이나 정책 중에 꼭 해야 할 게 있다면 다시 꺼내도 무방하다. 이를 두고 내 정책이라고 저작권을 주장하는 건 난센스다. 시간이 흘러도 전혀 진척이 안 됐다면 저작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중요한 건 실천이다. 표 욕심에 무조건 내걸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한 정책인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진짜 실천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발표하란 거다. 그래야 유권자가 믿을 수 있고 정책도 산다.

강갑생 JTBC 사회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