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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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하이데거」는 한 철학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죽음에 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있읍니까?』
5년 전 가을,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83세의 황홀한 노경에 접어들었을 무렵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 노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철학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음을 들으며, 새삼 80평생의 학문세계에서도 터득하지 못한 죽음의 문제를 그 뒤 불과 5년 사이에 깨우쳤을 것 같지는 않다. 이젠 고전이 되다시피 했지만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1927년)도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어쩌면 그 질문의 해답을 후학들에게 영원한 과제로 물려주었는지도 모른다.
만년에 그는 거의 저술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옛날의 묵은 강의록들을 정리한 소책자들만이 서점에, 드문드문 면모를 보일 뿐이었다.
「하이데거」는 10년 동안의 깊은 심열 끝에 저술한 『존재와 시간』을 통해 일개 무명철학자로 세계의 사상계를 진동시켰다.
l933년5월에는 그의 모교인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었다. 『독일대학의 자기주장』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그의 취임연설은 당시의 「히틀러」정권을 옹호하는 인상이 짙었다. 「히틀러」정권에 저항, 그 뒤에 독일에서 추방되었던 「야스퍼스」와 같은 철학자와는 그 행태에 있어서 대조적이었다.
「하이데거」는 그 무렵 「히틀러」식의 제복까지 입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는 「나치스」에 동조한 경력을 씻을 수 없어 교단에서 물러나 「프라이부르크」시의 교외에서 사색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60년대엔 「프랑스」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와 「라디오」를 통해 대토론을 벌여 잠시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물론 이들의 대화는 철학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지만 「사르트르」는 끝내 「나치스」에 협력한 그의 과거를 용서하려 하지 않았었다.
철인이 아니라도 난 인간이 허물없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하게 한다.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에 의해 전후의 사상세계를 풍미했던 실존주의에 있어서 「하이데거」는 특이한 입장을 추구했었다. 신과 마주서는 고독자로서의 실존(키에르케고르)이나 「휴머니즘」의 입장을 추구하는 실존(사르트르)과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는 현세적인 실존의 구명에 관심이 깊었다. 그의 실존주의는 인간이 발붙이고 사는 세계의 흙이 묻어있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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