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훈도는 애정 있는 설득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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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권위 인정 못 받는 교직자>
학원에서 학생이 선생에게 반항하거나 더구나 폭력 사태로 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학생들은 유전과 환경에 어딘가 결합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형성은 유전과 환경과 교육의 세가지 요건이 구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교육의 힘만으로 인간을 전적으로 개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전국에 많은 교도소들이 관광 「호텔」로 개조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학생들을 교화·지도하려면 교장이나 교사가 권위가 있어야 하겠는데 요사이 행정면에서나 사회 여건에 있어서 교직자들에게 얼마마한 권위를 인정하고 대우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또 가정에서나마 학원을 지지하고 협력해야 교육의 성과를 기대해 보겠는데 비협조적이요, 비판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우리나라의 교육열과는 어쩐 일인지 반비례하고 있다. 특히 말썽 많은 고등학교 교육에서 그러하다. 가령 납부금의 경우만 보더라도 국민학교 아동에게 제일 먼저 주고 다음에 중학생에게 주고 고교 학생에게는 김장부터 하고 대사부터 치르고 세금도 바치고 나서 맨 나중에 준다.

<가정의 비협조 안타까와>
고등학생은 선생의 독촉에 대항할 뱃심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버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것도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놈의 선생이 돈만 가져오라는 거냐』는 것이 보통이다.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교직자로서 냉랭하고 비협조적인 환경 속에서 제일 말썽 많고 반항 심리에 불타는 10대의 고교생들을 교화 지도하려다 보니 송곳이다, 몽둥이다가 등장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이러한 10대의 소년들을 잘 교화 지도함으로써 성취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 교직자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맹수나 한마도 길들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도 인간인 이상 아무리 「장·발장」의 후예라 할지라도 감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반항의 난동 있을 수 없다>
교육으로도 불가능한 것은 평생의 음치를 대 음악가로 만드는 일이라면 모를까 일시적인 과오를 지도 훈육하지 못 할리는 없다. 그런 일로 난동의 반항 사태까지 벌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눈물과 진심으로 설득한다면 적어도 반항의 난동은 부리지 않을 성싶다. 아무리 불량성을 띤 학생일지라도 선생이 진심으로 학생들에게 『나는 너를 훌륭한 학생으로 믿어 왔는데 나에게 이런 실망을 안겨 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식으로 타이른다면 반드시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평소부터 학생들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 학생편에서도 『선생은 나를 불신한다』고 좌절감을 가지고 있던 터에 선생이 조금만이라도 『잘 걸려들었다』는 태도로 깐죽깐죽 꾸중해 가면 반항을 할 가능성이 많다. 반항하지 않을 만한 약은 학생이라도 절대 심복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자 같은 골육지친이라도 그런 것인데 2차적인 사제간이나 상사대 부하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쉬운 마음과 마음의 교류>
옛날에 오기라는 명장은 졸병이 종기가 나면 자기 입으로 환부를 빨아 주었기 때문에 졸병들은 오기 장군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졌다. 먼저 마음과 마음이 통하도록 하는 것이 지도자의 할 일이다.
눈물로 뇌관부터 적시고 들어간다면 가슴속에 화약을 지니고 다니더라도 어떻게 폭발하겠는가.
고광만 전 문교장관이 필자와 동료였던 시절에 술회한 말이 생각난다.
고 장관이 전주고보 학생시절에 극장에 갔다가 들켜서 교무실에 호출을 당하고 호되게 꾸중을 들을 각오를 했었는데 담임 선생이 자기를 보자마자 만면에 눈물을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그후로는 극장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노라고.
어쩌면 한번 눈물의 위력을 발휘해 볼 수는 없는가. 모든 행위가 동기와 결과가 다 좋아야 하지만 특히 학생 지도는 결과가 좋아야 한다. 인격 형성의 과정에서 인간을 망쳐서야 되겠는가. 【김종무 <전 경기고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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